오! 카프카

11월 9일 카프카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11-16 03:58
조회
67
# 시작은 그물

카프카 작품을 여는 주인공은 주로 평범한 사람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삶의 형태 안에 놓인 인물,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일상 규칙이라는 촘촘한 그물 어딘가에 '걸려있는' 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예를 들어 카프카 작품에는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고 이웃이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세상과 고립되어 산속에 사는 인물이라든가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의 작품에 포세이돈이라는 신이 나오기도 하지만 신 역시 회사일 하느라 바빠 휴가갈 시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물에 걸려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카프카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이 일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작점인 일상의 그물, 너무 촘촘해서 거의 천에 가까운 이 그물에 구멍을 내고 그 틈으로 출구를 찾아내는 과정을 그립니다. 때로는 변신으로, 때로는 단식으로, 혹은 살인으로든 뭐든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그 매력에 빠지고 나니 어느새 카프카 단편을 다 읽고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카프카가 찾은 출구를 시도해보고 싶어하는 저를 발견했지요.

# 어느 개가 찾은 출구

카프카가 고심해 찾아낸 출구, 그리고 그 쉽지 않은 과정이 전부 녹아있는 작품이 <어느 개의 연구>가 아닐까 합니다. <어느 개의 연구>에는 카프카 다른 작품에서 보았던 많은 테마가 등장합니다. 단식, 변신, 노래, 연구(학술) 등등이 나오는데, 저는 이 작품이 카프카의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노래하는 일곱마리 개와 만난 강아지는 이들의 노래소리를 들은 이후 개라는 종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종족의 본성을 떠올리고, 개는 뭘까를 질문합니다. 질문을 마주하자 나는 서서히 종족에게 거리를 두고 빠져나와 그들을 관찰합니다. 나는 뭔가, 우리는 뭔가, 저들은 무언가를 탐구하고 연구합니다. 처음에는 무엇에서 양분을 얻어 사는가 하는 연구, 즉 섭생을 가지고 연구하다가 나중에는 음악을 연구합니다. 연구에 매진하던 개는 단식에 돌입합니다. 개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질문하던 '어느 개'는, 개를 살리는 것을 덜어내야 그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으므로 먹는 걸 덜어낸 것이죠. 공부 역시 나를 살렸던 걸 덜어내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말씀해주신 선민샘의 해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카프카를 읽으며 제가 한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단어의 의미, 상징, 인과 관계에 대한 추측 방식 등이 얼마나 터무니없을수 있는지 하나하나 그것들을... 덜어내며 배우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어느 개는 종족의 골수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안에 있는 독극물을 빨아내고 싶어서입니다.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어 우리를 위협하는 독극물을 빼내려는 시도가 학술이자 예술인걸까요? 연구를 계속하던 어느 개는 '공중견'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모두가 말도 안된다고 하지만 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카프카가 찾은 출구이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학술과 예술이 해야할 역할일까요? 개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뿐인데 어느 개는 종족 전체와 싸우게 됩니다. 그들은 불편한 가능성을 인정하느니 독극물을 품에 지니고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이 외로움과 불확실함을 알면서도 질문을 붙잡고 가는 일, 길을 뚫어 창문 하나를 더 열어보이는 일이 카프카가 생각한 글쓰기이자 예술이었던걸까요?

# 출구는 가까이에

어느 개는 종족 밖의 이야기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눈앞에 있는 존재, 내가 본 그들, 내가 놓인 환경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침내 스스로 '날아가듯이 뛰는' 공중견으로 변신합니다. 카프카는 규칙이라는 그물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 된 이상적인 상황을 꿈꾸지도, 그리지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그러니까 나를 구속하는 언어와 규칙을 인정한 다음에 그 언어와 그 규칙으로는  절대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카프카식 출구가 아닐까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보다 이런 옆으로 비껴서기가 더 희망적이라 느껴지는 건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린 이미 도구가 있습니다. 우리 곁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무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자와의 대화에 나오듯 하루에도 다섯 번 무너지는 집이라면, 그 집터에 남은 폐허로 또 다른 집을 짓는게 아니라 신발을 만들면 된다고 하는게 카프카식 출구는 아닐까요? 물론 카프카라면 신발이든 자전거든 스케이트보드든 그 수많은 가능성을 여전히 남겨둘 것 같네요. 나에게 맞는 선택지(출구)를 찾아가는 힘, 내가 고른 선택지 이외의 선택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 그 수많은 가능성을 존중하는 마음이 지금 우리가 카프카를 만나며 얻는 가르침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카프카 세미나 세번 째 시즌도 몇 번 안남았네요. 카프카는 날아오르기에 대해 여러 번말하는데요, 나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왜 자꾸 카프카가 공중을 떠올렸는지, 다이빙하다보면 하늘을 헤엄치게 된다 하는지 (여성의 애독서)..  언젠가 알게 될 지도 모를 그 날을 꿈꿔봅니다. 매번이 힘겹지만 그래도 같이 헤맬수있어 힘이 난답니다. 그 힘을 다시 또 헤매는데 쓰고... 이렇게 마성에 빠지는건가봅니다(ㅋㅋㅋ)  후기가 너무 늦어서 내일 바로 뵙겠네요. 오늘도 어떤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되네요. 그럼 조금 이따 뵈어요!
전체 2

  • 2017-11-16 16:30
    다섯번 무너지는 집에서도 도통 좌절을 모르는 태도ㅋ 아 좋아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억압으로 느끼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널려있는 재료를 이리저리 활용하는 창작 본능이란 정말 배우고 싶네요.

  • 2017-11-18 17:36
    변신과 단식과 살인의 풍경 속에 홀로 서 있는 뽀영! 폐허를 직시하면서, 지금 자기 손에 쥔 것들을 의심하는 뽀영의 독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