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숙제방

장화홍련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0-13 16:53
조회
39
171013 동화인류학 / 장화홍련 / 혜원



엄마와 자식의 대결



엄마는 죽어야 하는 걸까? 이번에 읽은 동화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무지 오래 살아 있는 엄마가 없고, 오래 살아있어도 자식을 죽이는 엄마뿐이다.

엄마를 떠올리면 자식 입장에서는 아빠보다는 더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엄마는 직접 낳아준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엄마도 자기가 직접 낳았으니 자식에게 애착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엄마-자식 관계를 생각하기가 쉽다. 그리고 동화에서 새엄마는 전처의 자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칼에 에이는 것 같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고 못된 계략을 꾸민다. 아무래도 친자식이 아니라서? 하지만 다시 보자, 동화에서 엄마가 죽이는 것은 친자식뿐이다. 의붓자식은 그로 인해 집안의 궂은일을 하거나 집을 나가거나 혹은 죽임을 당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엄마를 죽이고 가족 구성원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장화 홍련>은 엄마가 셋 등장한다. 친엄마 장씨, 후처 허씨, 그리고 다시 장화 홍련을 낳는 윤씨. 허씨의 계략으로 장화는 그야말로 '애매하게' 죽는다. 이 표현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하지만 장화는 죽고 나서도 누런 용을 타고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약초를 캐러 다닌다. 이승의 태를 벗고 용을 타고 다니는 장화의 모습은 원한에 차 있지도 동생에게 복수를 사주하지도 않는다. 나는 여기 잘 있다. 너는 거기서 잘 살아라.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 홍련의 꿈에 나타난다.

그런데 홍련은 그 꿈을 계기로 슬퍼하다가 못에 뛰어든다. 나는 홍련의 죽음이 늘 이상했는데, 장화는 모함 받고 죽음을 강요받기라도 했지 홍련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는데 제풀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장화가 저승에서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장화홍련>의 송사는 사실 홍련의 죽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다시 <장화 홍련>을 봤는데, 친엄마 장씨가 죽었을 때 장화는 일곱 살로, 그때부터 집안의 살림을 도맡았다고 했다. 장화는 장씨의 죽음을 계기로 일을 하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련은 당시 세 살. 거기다 홍련을 보호하는 장화와 아빠는 늘 장씨를 그리워하며 홍련을 붙잡고 울었다. 그런 모습에 익숙한 홍련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엄마 노릇을 한 장화에 대한 집착이 생겼고, 그리고 엄마를 잃었을 때 슬퍼하는 모습만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장화와 달리 홍련은 자신이 집착하는 가족의 모습이 있는 것.

홍련은 기어이 저승에서 약초 캐던 장화를 데리고 고을 부사 앞으로 간다. 그리고 죽었으면서도 계속해서 이승의 일에 간섭해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한다. 그 청원은 마치 자신들이 새로 태어날 집을 깨끗이 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홍련은 자신의 분을 못 이겨 언니를 따라 죽은 게 아니라 허씨 체제 아래에서는 도저히 자신이 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을 보면 남매의 엄마는 (은근슬쩍 ‘의붓엄마’로 표시한)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남매를 숲에 내다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남매는 눈이 나빠 먼 곳을 보지 못하지만 냄새를 잘 맡는 마녀의 손에 떨어진다. 자기 먹을 입을 생각하여 멀리 보지 못하고 늘 먹을 것을 탐색하는 엄마를 닮은 마녀. 그레텔은 그 마녀 밑에서 궂은일을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수행을 닮았다. 물을 긷고 가축을 치고, 그리고 가정 살림의 가장 중요한 화덕을 다루는 법을 배우자 그레텔은 마녀를 죽이고 그녀를 계승한다. 이런 것을 보면 엄마는 자식의 본체도 아니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거나 자식을 자기 것처럼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엄마는 늘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자식과 대적한다. 그래야 자식도 살고, 자신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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