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1강 "68혁명과 <안티 오이티푸스>"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2-14 14:31
조회
182
잘은 모르지만,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은 확실히 뭔가 달라 보입니다. 유류세 인상 문제로 시작된 시위는 온갖 불만들이 터져 나오면서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되지 않고 하나의 정당이나 세력으로도 조직화되지 않는 잡음들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죠. 이에 마크롱은 정부 정책에 관한 대토론회를 열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시장들과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정치인도, 정당도, 세력도 노란 조끼 운동을 충분히 대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시위자들이 이민자들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한편 다른 시위자들은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을 나타내서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고, 누군가가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상을 요구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정부가 속도 제한을 시속 80킬로미터로 낮췄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고 하죠. 브뤼노 라투르는 이 시위에 대해 “프랑스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노란조끼와 귀가 완전히 닫혀 있는 정부가 있다”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채운샘은 노란 조끼 시위를 보며 우리가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문 같은 하나의 공통된 매체로부터 정보를 습득하지 않고, 각자가 각자의 매체를 통해 습득한 정보들을 가지고 각자의 세계와 각자의 진실을 구축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습득한 정보에 우리의 욕망이 결합되는 방식 역시 각양각색이죠. 때문에 ‘저항’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이전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계급투쟁과 민주화운동의 시대 때와는 달리, 사람들은 이제 하나의 구호아래 공통의 적과 싸우지 않습니다. 재작년 촛불집회만 보더라도, 사실은 ‘저항’이나 ‘싸움’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비장함 자체가 없었죠. 10대부터 노년까지, 극좌에서 극우까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너무나 다른 목소리들을 내고 있는 노란 조끼 시위에서는 이러한 변화 내지는 차이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채운샘이 던지신 화두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혁명을 꿈꿀 수 있을까? 예전과 같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체제를 전복하는 것으로서의 혁명은 더 이상 상상하기 힘듭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거시적 정치의 차원을 개혁하는 것이 우리의 환원 불가능한 욕망의 차원에서의 혁명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 억압인지, 누가 적인지도 모르겠고 사실은 억압이라는 것이 있는지, 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호한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혁명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여전히 혁명을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번 강의를 듣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본과 국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혹은 강요하는) 주류적인 삶의 양식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도록 해주지 못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방식의 삶이 너무나 뻔하고 무기력함을 매일 체험하고 또 이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운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제도의 변혁도 체제의 전복도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혁명을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혁명의 힌트를 얻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안티-오이디푸스』가 있습니다. 채운샘이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안티-오이디푸스』는 ‘작동’만이 있는 책입니다. 가령 이 책에 등장하는 ‘기계’라는 개념의 연원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이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관념들의 계보 속에서 얌전히 한 자리를 지키며 철학의 왕국의 한 부분을 이루는 대신에,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고 사용하는 순간 우리의 현실을 변용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푸코는 『안티-오이디푸스』를 ‘새로운 이론적 참고서’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책으로부터 헛되이 총체화하는 “철학”을 찾으려 하지 말고 “성애의 기술Ars erotica, 이론의 기술ars theoretica, 정치의 기술ars politica”을 작동시키라고 말했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고민 속에서 이 책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앞으로 매주 이어질 강의와 사전 세미나에서 이 책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68혁명의 경험 이후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현재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나온 ‘정치적인’ 텍스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정치’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정치입니다. 여기에는 정당도 조직도 강령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만국의 ~여 단결하라’ 같은 정치적 선동도 없고,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을 내세우는 유토피아적인 기획도 없습니다. 이들의 기획은 훨씬 더 자연주의적입니다. 이들이 보기에는 자본주의조차도 자연의 일부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자연) 안에는 도주로가 내재해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이 행하는 ‘정치’란 자본주의의 미시적인 메커니즘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도주로를 발명해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분열증’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분열증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병증인 동시에(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의 도주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신 질환에 대한 가타리의 질문이 작동하고 있죠. 가타리가 보기에 정신병은 본질적으로 의학 외부와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정신병(광기)은 ‘신경계의 화학적 불균형’ 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적 현상’(사회적인 것과의 대립을 함축한 것으로서의)도 가족 배경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개인적인 질환도 아닙니다. 그것은 “제반 사회 요소들 사이의 문제점의 표현인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저항이거나 도피”(채운샘 강의안)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타리는 정신분석에 의문을 갖게 된 것이죠.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자 사회가 내적으로 고장 나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한 환자들을 ‘정상화’하는 것, 이들을 사회로 되돌려 놓는 것을 ‘치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상을 재생산하는 것을 치료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분열증자는 ‘주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나’로 되돌아오는 안정된 지반을 상실하고 있죠. 이들은 고정된 주체가 억압하고 있던 다종다양한 힘들을 해방합니다(n-1). 마치 말년의 니체가 붓다가 되었다가 디오니소스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이 되기도 했던 것처럼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서 도주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미쳐버리는 것은 결코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자본주의에 의해 붕괴된 분열증 ‘환자’가 되지 않고, 자본주의로부터 도주하는 분열증적 생성을 이룰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열증적 분석을 행합니다. 역사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과적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분석하기(역사의 사건화, 계보학). 그램분자적 차원에서 사안의 옳고 그름,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분자적 차원에까지 내려가서 문제의 형성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라는 들뢰즈-가타리적인(그리고 스피노자적인) 질문이 아닐까요? 거시적 차원에서 억압의 외부적인 원인을 규명하거나 구조적 모순의 불가능한 해결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예속을 향해가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메커니즘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기. 여기에 『안티-오이디푸스』가 제공하는 다른 혁명에 대한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 지난 시간 공지드린 것처럼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규문에서 『안티-오이디푸스』사전 세미나가 열립니다. 세미나 형식은 매주 정해진 분량을 읽고 와서 자유롭게 생각과 질문을 나누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시간 ~ 1시간 반 정도 열띤 세미나를 하고 규문에서 함께 저녁식사(무료입니다^^)를 하신 뒤 이어서 채운샘 강의를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주(2/18)에 읽어오실 분량은 서문과 1장 끝까지(~95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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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18 12:46
    분자적 차원의 분열. 예속과 자유의 문제가 욕망 메커니즘의 미시적 분석과 관련이 있군요. 책의 작동, 사유의 작동. 이론과 실천의 낡은 구분이 마구 깨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