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2강 "기계와 다양체"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2-22 12:10
조회
165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아닐까? 채운샘은 질문과 함께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인간’이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사실 인간 또한 그것을 만들어내는 실천들의 산물일 뿐이죠. 도덕, 신념체계, 감정, 얼굴 …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너무나 하찮고도 소중한 것들. 이런 것들의 총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 분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 쾌락들에 둘러싸여 느끼는 끝없는 무기력,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혐오와 냉소. 어떤 방식으로도 ‘외부’를 향할 수 없게 되어버린 에너지들이 인간 자체에 대한 분노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채운샘은 스피노자, 니체, 붓다 등의 인기가 바로 이러한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참을 수 없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진단하셨습니다. 이들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랑하고 또 혐오하는 인간. ‘인간의 임계점’에 도달한 지금, 인간(주체, 나) 자체를 다르게 사유하지 못하는 한 자유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주에 살펴보았던 들뢰즈-가타리의 ‘기계’ 개념도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사유를 위한 도구입니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식을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채운샘의 당부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계’라고 하면 ‘이 기계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때의 그 자동화된 기술 기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기계’를 가져올 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험적인 주체나 자유의지 같은 것 없이 끊임없이 접속/절단 하는 작동만이 있는 존재입니다. 우선 들뢰즈는 가타리와 만나기에 앞서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문학 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때 들뢰즈는 저자나 의미작용 체계에 종속되지 않는, 총체성을 거부하는 개념으로서 ‘문학 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문학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들뢰즈는 의미, 본질, 의도 등등을 묻는 본질주의적 접근을 거부하고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가타리는 여기에 ‘구조로부터의 이행’이라는 의미를 첨가했다고 합니다. 당시 라깡을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주된 논조는, 그들이 ‘역사’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일반성의 차원을 이야기함으로써 ‘주체 없는 사유’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 안에서 모든 것들은 구조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혁명’을 사유할 여지가 없죠. 때문에 68혁명에 대해 사람들은 ‘사르트르의 복수’라는 논평을 했던 것이죠. 가타리는 시간, 날짜, 사건, 역사를 사유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합니다. 기계는 무엇도 똑같이 복제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오작동, 고장, 정지, 삐걱거림을 내포한 채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가타리가 생각한 기계입니다. 가타리는 주체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정태적인 구조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는 우리의 욕망에 혁명성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죠.

우선 기계 개념은 유기체적 사고와 싸웁니다. 개별적 대상들을 전체에 종속시키고 전체 안의 분할들로서 파악하는 방식. 플라톤이 이러한 유기체적 사고의 대표주자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전체로서의 이데아의 세계를 먼저 상정하고, 그에 비추어 개별적인 대상들의 세계를 위계 짓고 구분했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전체’의 체계에 얌전히 복종하지 않는 것(시뮬라크르)들은 추방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사유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전체로서의 몸과 그러한 몸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자아’를 앞에 두고, 우리의 몸의 모든 부분들을 목적과 기능에 따라 분할하는 방식. 이때 부분대상들은 ‘보기 위한 눈’, ‘먹기 위한 입’처럼 전체로부터 부여된 기능들로 정의되는 기관이 됩니다. 유기체Organism는 이렇게 대상들을 기능과 목적을 부여받은 기관Organ으로 규정하는 조직화Organizing을 통해 출현합니다.

유기체적 사고에는 전체를 상정함으로써 모든 것을 동일화하려는 파시즘적 욕망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사회가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각자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상태를 이상으로 삼습니다. 이때 모든 종류의 불화, 정상성으로부터의 이탈 등은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죠. 이에 비해 ‘기계’ 개념을 통해 볼 때 대상들은 미리 주어진 전체에 종속되지 않고 각자의 기능을 변환해가면서 매번 전체를 생산합니다. 저는 현대축구를 떠올렸는데요, 현대축구의 핵심은 바로 포지션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최전방에서부터 수비를 시작하고 골키퍼에서부터 빌드업을 시작하는 것, 각자의 포지션에 할당된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기능변환을 이뤄내며 다양한 공격루트를 만드는 것이 좋은 팀의 필수적인 덕목이죠. 들뢰즈-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 중인 세계들의 총합으로서의 전체(우주)를 사유합니다.

이와 더불어 기계 개념은 욕망의 혁명성을 말합니다. 욕망은 기계라는 것. 욕망은 그저 ‘작동’한다는 것. 정신분석을 비롯한 기존의 담론들은 욕망을 어떤 대상을 향하는 것으로 보거나 무언가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때 욕망이란 언제나 그것이 향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그것이 표상/대리 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결여’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여를 부여받게 될 때 욕망은 다시 안전하게 유기적 구조로 통합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욕망에는 언제나 ‘작동’만이 존재하며 때문에 유기적 구조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제나 고장과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자본주의란 단순히 자본과 주체, 상품과 주체의 관계로는 정의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우리의 욕망의 작동과 더불어 구성됩니다. 이때 욕망은 대상의 소유라는 문제에 종속되죠. 그런데 자본주의가 욕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부터 재생산되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의 도주 또한 욕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통해 총체화하는 사유와 싸우며 욕망 자체의 혁명성을 사유하고자 했습니다.

다음 주 사전 세미나에 참여하실 분은 《안티-오이디푸스》 1장(~95쪽)을 읽고 5시까지 규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전한역 선생님과 배현숙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전체 2

  • 2019-02-22 13:43
    기계는 무엇도 똑같이 복제하지 않는다는 게 재밌어요. 포지션에 종속되지 않고 포지션을 해체하는 움직임~

  • 2019-02-23 22:39
    들뢰즈 개념들만 귓동냥했을 때 기계 개념이 뭔지 막연한 궁금증으로 남아있었어요. 강의 들으면서 인간 주체적 사유를 벗어나려는 철학자들의 시도가 이 기계 개념에도 들어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어요. 기계를 정해진 기능으로 작동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접속 절단으로 작동됨만 있는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도요. 이 개념을 통해서 들뢰즈가타리가 '미리 주어진 전체에 종속되지 않고 각자의 기능을 변환해가면서 매번 전체를 생산'해 내는 차원에세 세계를 사유했다는 점은 더 생각해 볼 문제로 제게 남아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