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10강 "도주로의 발명 : 분열분석과 미시정치"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4-25 15:50
조회
147
지금 우리는 ‘광기’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저는 범죄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통해서만 광기를 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인’들은 우리의 일상의 영역에서 사라졌습니다. 끔찍한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조현병 병력’이라는 말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광기의 전부죠. 지금 광기는 범죄의 원인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관리’해야 할 정신병일까요? 정신병을 그 자체로 범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위험을 완벽하게 ‘관리’하고자 할 때, 결국 우리는 ‘사회’나 ‘국가’의 편에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모든 ‘부적응자’들을, ‘사회화’되지 않는 자들을 위험 요인으로 보게 되는 게 아닐까요? 물론 전문가들은 신중하게 중립을 자임하며 ‘모든 조현병 환자들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현병 환자들이 실제로 위험한지, 정신병을 범죄의 원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광인과 범죄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광기’ 자체가 배제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광기가 소거될 때, 우리는 광기의 문제를 사유할 수 없게 되고 우리의 ‘정상성’에 대해 질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광기가 실제로 위협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일까요, 아니면 사회체의 안전일까요?

아이들은 타고나기를 분열증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광기로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죠. 아이들은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종종 어릴 적에 단짝 친구와 서로 꾸며낸 이야기를 끝도 없이 들려주며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중요했던 건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인가였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정체성이나 기억에 집착하지 않고 변덕을 밥 먹듯 부리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는 대신 줄행랑쳐버립니다. 이러한 분열증자 아이들을 축적하고 영토를 늘리고 관계를 독점하려드는 편집증자로 만드는 것은 (거세 공포가 아니라) 사회체입니다. 어려서부터 학원을 전전하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가르치는 사회.

분열증자 아이들이 편집증자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는, 물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족이란 욕망적 생산이 경유하는 하나의 영토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의 문제는 결코 가족의 문제이기만 할 수 없는 것이죠. 가족은 출발점도 도착지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가족’이라는 표상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요? 가족은 하나의 영토일 뿐임에도 종종 사람들은 가족이 ‘모든 것’인 양 그것에 집착합니다. 내 인생이 비참한 건 내 부모가 가난해서이고, 흉악범이 그렇게 된 것은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탓이고, 내가 이렇게 돈에 집착하는 것은 내 가족들에게 좋은 것만 주기 위해서이고, 내가 인간관계에서 무능한 것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 지금은 가족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근친상간 금지를 인간의 근본적인 억압으로 설정하는 동시에 어느 때보다도 부모-자식 간의 은밀한 정서와 신체접촉을 권장했던(사랑과 보살핌의 이름으로) 근대 가족은 가장 은밀한 폭력성이 폭발하는 다이너마이트가”(채운샘 강의안 中) 되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는 어째서 여전히 가족에 집착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가족 바깥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는 ‘사유화’입니다. 맑스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상품이 ‘사회적 관계’가 지워진 채 ‘얼마짜리’라는 교환가치의 형태로만 현현할 때 거기에서 노동으로부터 착취한 가치는 은폐됩니다. 즉 상품의 가치를 생산해낸 사회적 노동은 보이지 않게 되고, 마치 자본이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이에 따라 부의 사유화는 완벽한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포함한 상품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들을 ‘정당하게’ 지불하고 남은 잉여분이 자본의 몫으로 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지는 것이죠. 사회적 노동을 제거함으로써 부를 사유화하기. 가족은, ‘사유화’를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가족주의는 가족관계에 내재한, 가족으로 환원되지 않는 코드들을 모두 해체하고 ‘엄마-아빠-아이’를 ‘사랑’이라는 보편적이고도 사적인 관계로 규정합니다. 이에 따라 가족은 사회장으로부터 분리되고 분열증자 아이의 무의식은 가족이라는 협소하고 사적인 영토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결핍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편집증자 성인이 되죠.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이기 때문에 대개 죄책감과 결여감에 시달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가족 문제는 가족 바깥에서 사유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가족의 사유화인 것이죠.

언제나 가족적 투자들보다 사회적 투자들이 선차적입니다. 그러니까 ‘엄마-아빠’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두 축이기 이전에 특정한 사회적 배치의 산물인 것이죠. 가족은 언제나 사회적 장(場)에 직접 노출되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독립된 영토는 없는 것이죠. ‘가족’을 사적인 영역으로서 출현하게 만드는 특정한 사회체의 작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외부’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가족 자체의 힘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냐 사회냐가 아니라, 가족이 어떠한 힘으로 작도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은 언제나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합니다. “외부에 대해 벽을 쌓은 채 모든 것을 축적하고 표상하고 사유화하는 가족, 이와 달리 언제나 외부에 의해 횡단되고 외부를 향해 열리며 다형적 관계들을 통해 변주되는 가족.”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는 ‘사회체’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물적토대’를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욕망과 무의식의 차원을 사회구조의 반영 정도로 평가절하했습니다. 이때 프로이트는 욕망을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토와 정상성이라는 사회적 척도에 복종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단순히 정치권력의 교체나 사회구조의 개혁 같은 것으로 ‘혁명’의 문제를 축소하면서, 혁명의 표상을 동원하여 욕망의 혁명성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들뢰즈-가타리는 사회장이 어떻게 욕망에 직접 투자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요청된 이상한 개념이 바로 ‘기관 없는 몸’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으며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개념이 바로 이 기관 없는 몸이었는데요, 이 개념은 “사회장 전체를 모든 것이 정태적으로 규정된 ‘구조’로 보기를 비판하기 위한”(채운샘 강의안 中) 개념이라고 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사회를 중심-주변으로 나눌 수 있는 유기적 몸체가 아니라 욕망 기계들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기관화되지 않는 표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사회체와 욕망 기계만을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억압적이고 정태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회체도 언제나 ‘누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욕망적 생산이 사회체에 대해 선차적이기 때문이죠. 기관 없는 몸은 ‘욕망적 생산의 선차성’을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체의 극한에는 언제나 기관 없는 몸이 있습니다. 따라서 욕망은 언제나 그 자체로 사회적입니다. 욕망 기계의 작동과 더불어 사회체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중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욕망을 규정하는 선험적 구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혁명성을, 우리의 존재역량을 확장하고 실험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정상성에 맞추거나 대의를 위해 욕망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은 욕망 기계를 가족적 재현 속에서 으깨버립니다. 결코 표상화되지 않는 욕망을 하나의 표상 안에 가두는 것이죠. 이와 달리 분열분석은 “너의 욕망기계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만을 묻습니다. 그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올바른 욕망인지 아닌지, 그것의 목적이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대신에 욕망 기계의 작동만을 문제 삼습니다. “욕망 기계들을 분자적 질서에 관련시킬 것인가, 유기체나 사회 기계들을 형성하는 그램분자적 질서에 관련시킬 것인가?”(채운샘 강의안 中)

분열분석의 과제는 욕망을 표상과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욕망은 가족도 인물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계들과 사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어떠한 욕망’이 먼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적 재현, 결핍의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작동하는 욕망의 그램분자적 사용과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열리는 분자적 사용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욕망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결국 ‘억압된 욕망’에 자유를 허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다른 사용을 실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욕망적 혁명의 분열분석적 공식은 무엇보다 이럴 것이다. 곧, 각자에게 자신의 성들을”(493) 따라서 우선 분열분석의 임무는 욕망에 대한 ‘해석’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이 만든 욕망의 극장무대를 파괴하는 것.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는 것, 환자들을 공장으로 데려가고, 저항하게 하는 것,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요소들 속에서 욕망의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뽑아내는 것.”(채운샘 강의안 中) 그러나 탈영토화된 흐름들은 늘 재영토화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램분자적 구성체가 아닌 분자적 구성체는 없고, 사회기계들 바깥에 실존하는 욕망기계도 없습니다. 때문에 주어진 사회적 배치를 의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욕망을 꿈꾸는 것 역시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의 혁명적 사용이란 매번 마주하는 벽을 돌파해가는 것, 중단 없는 과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고드린 것처럼 다음주에는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코뮨이 돌아온다>에 관한 깜짝 세미나가 열립니다. 10주 동안의 문제의식을 보다 구체화하고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니, 다른 일정이 없으신 분들은 꼭 참석해주세요~ <코뮨이 돌아온다>를 읽고 오시는 게 가장 좋고, 사정이 안 되실 경우엔 그간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준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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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7 18:59
    매번 마주하는 벽 앞에서 출구를 열어라. 중단 없는 과정, 목적 없는 움직임 그 자체로 충분하다. 흑! 감동!
    코뮨이 돌아온다. 제목도 멋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