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9강 "욕망을 자본화할 것인가, 분열증화할 것인가"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4-18 15:05
조회
130
먼저 공지가 있습니다. <안티오이디푸스 읽기>를 10강까지 모두 마친 뒤 4월 29일에 보강 겸 깜짝세미나가 열립니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코뮨이 돌아온다》라는 책에 관해서 채운샘께서 기조발제를 하신 뒤, 《코뮨이 돌아온다》에 관해 토론하고 그동안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갖고자합니다. 《코뮨이 돌아온다》를 읽고 오시는 게 가장 좋고, 읽지 못하시더라도 10주간의 강의를 정리하는 시간이니 다른 일정이 없으시면 꼭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코뮨이 돌아온다》는 ‘보이지 않는 위원회’가 《반란이 조짐》이라는 책을 출간한 뒤 ‘테러계획과 연관된 범죄조직’으로 지목되어 프랑스 경찰에 체포된 지 7년 만에 출간한 새 책이라고 합니다. 《코뮨이 돌아온다》는 정치체로 환원되지 않는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이라고 하니, 이번 강의의 화두이기도 했던 ‘새로운 혁명의 이미지’라는 문제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이번 주 강의는, 돈 드릴로의 《코스모폴리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소설은 주식 투자로 순식간에 억만장자가 된 에릭 패커의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가 우리가 갖고 있는 ‘자본가’의 표상에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리무진을 타고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티커(변동하는 시세를 보도하는 유선 인자식 전신기)를 들여다보고, 차 안에서 자신과 협업하고 있는 주요 담당자들을 만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공장을 돌리거나 물건을 거래하거나 직원들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그저 익명성이 보장된 하얀 리무진을 타고 도시를 흘러 다니며 통화의 흐름을 뒤좇을 뿐이죠. 에릭은 자신의 일을 거의 예술에 가까운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에릭에 따르면 그가 하는 일은 무질서해 보이는 화폐의 흐름으로부터 ‘미와 정확성’을 포착해내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코스모폴리스》라는 제목이 프리츠 랑 감독이 1927년에 만든 《메트로폴리스》의 패러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27년 프리츠 랑이 묘사한 자본주의는 지하의 노동자들과 고층 빌딩의 꼭대기에서 그들을 관리하는 자본가로 나뉜 질서정연한 세계였습니다. 이때 자본주의의 문제는 노동자들의 신체를 규율하고 위기를 조정하여 질서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코스모폴리스》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런 식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돈 드릴로가 보여주는 ‘코스모폴리스’의 뉴욕에는 자본가 에릭 패커가 탄 리무진과 체제에 맞선 시위자들과 무슬림 래퍼의 추모 행렬이 공존합니다. 드릴로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미 무질서와 위기, 고장을 내부화 해버린 자본주의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카오스의 아이러니함은, 끊임없는 위기의 재생산을 통해서 ‘질서’가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위기’라는 말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오일쇼크, IMF, 서브프라임 등등.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이러한 ‘위기’가 엄습할 때마다 ‘자본주의’는 더욱 공고해져왔습니다. 위기가 일상화되고 불안이 만연해짐에 따라 각자의 삶이라는 기업을 운영하는 1인 CEO가 되어, 위기를 관리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철저하게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일종의 통치술이 되어버린 것이죠.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는 ‘무질서’라는 외양을 통해 질서를 유지합니다. 위기를 내부화함으로써 실제 위기(즉 통제를 벗어나는 욕망들)를 예방하는 것이죠. ‘살기 어려워졌다’라는 말에는 사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떠올랐습니다. 저자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체제에 대한 옹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누구도 자본주의가 최고의 시스템이라고, 튼튼하고 안정된 체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순과 불안정성에 대해 떠들어댑니다. 그리고 온갖 사안들에 대한 시위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오히려 지금 자본주의는 누구도 그것을 옹호하지 않을 때 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강력한 전제가 작동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위기’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위기로부터 벗어나 ‘안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또다시 우리를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포섭될 뿐이겠죠. 돈 드릴로의 소설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보다 나은 자본주의’를 요청하는 저항은 “시장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입니다. 이에 앞서 언급한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다른 봉기’를 상상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같은 최근의 저항 운동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는 어떤 ‘반란의 조짐’을 읽어냅니다.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의 실제 내용은, 하마 등의 포스트잇처럼 사후에 그 운동에 붙여진 보다 나은 급여, 괜찮은 주거, 보다 후한 사회보장의 요구가 아니라 우리에게 강요되는 삶에 대한 혐오였다. 그것은 각자가 혼자 밥벌이를 하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성장하고 혼자 건강을 돌봐야 하는, 우리 모두가 혼자인 삶에 대한 혐오였고, 메트로폴리스 속 개인의 비참한 삶의 형식―철저한 불신, 스마트하고 세련된 회의주의,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사랑, 그에 따른 모든 만남의 광란적 성애화, 그런 다음 안락하고 절망적인 이별로의 주기적 회귀, 끊임없는 기분전환, 그에 따른 자신에 대한 무지, 그에 다른 자신에 대한 두려움, 그에 따른 타임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혐오였다.”(<코뮨이 돌아온다>, 49쪽)

언젠가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테이크 셸터》라는 영화를 인용하며 위기 앞에서 ‘대피소를 짓지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 커티스는 태풍이 몰아쳐 모든 것을 쓸어가버리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며, ‘미래’의 위험을 대비할 대피소를 짓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합니다. 결국 커티스의 망상은 현실로 판명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태풍이 왔을 때 커티스는 대피소에 있지 않았습니다. 비포는 대피소를 짓는 순간 우리는 공황과 재난의 딜레마에 제 발로 사로잡혀 들어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위기’라는 협박을 믿지 않을 때, 다른 무엇을 요청하고 다른 누군가를 믿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믿을 때, (혁명적 욕망이 아니라) 욕망 자체의 혁명성을 믿을 때 혁명은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보편적 탈코드화’를 확보합니다. 도처에서 흐름들을 해방시키죠. 그러나 자본주의는 언제나 동시에 욕망의 흐름들을 응고시킵니다. 자본주의 공리계가 작동하는 지점까지만 욕망들을 해방하는 것이죠. 욕망을 해방시키고 그 흐름들이 위기를 초래할 때마다 극한을 이전시키면서 작동하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보편적 탈코드화 안에서 모든 종류의 코드들이 다시 작동하게끔 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는, 상상적이건 상징적이건, 온갖 종류의 잔여적·인조적 영토성들을 세우거나 재건하여, 이 영토성들 위에서, 추상량들에서 파생되는 인물들을 잘못 또는 잘 재코드화하고 틀어막으려 한다. 국가들, 고향들, 가족들, 이 모든 것이 다시 지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그 이데올로기에 있어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의 얼룩덜룩한 그림〉이라 불리는 까닭이다.”(안티 오이디푸스, 71쪽)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분열증적 경향들을 해방시키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분열증 자체와는 다릅니다. 분열증자가 주어진 코드들과 영토성들로부터 도주하는 ‘절대적 극한’이라면, 자본주의는 보편적 탈코드화의 흐름 위에 끊임없이 기존의 코드들과 영토들을 허물고 또 다시 설립하는 ‘상대적 극한’입니다. ‘가족’ 또한 자본주의가 동원하는 영토성 중 하나입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가족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경제적 활동 바깥에 놓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가족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지평의 바깥에 순수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세움으로써 욕망을 ‘엄마-아빠-나’로 이루어진 ‘작은 자아’에 가둠으로써 가속화된 자본의 흐름에 복종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종종, 예를 들어 《백년의 고독》 같은 소설을 읽다 보면, ‘가족’이란 무엇인지 새삼 되묻게 됩니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의 일대기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들 부엔디아 패밀리의 역사에는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이 개입합니다. 누군가는 혁명가가 되고, 집시들과 마법사들이 끼어들며, 또 서양의 자본이 그들을 엄습하기도 합니다.

‘가족’에는 이미 자연과 시대와 역사와 자본과 … 모든 것들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죠. 지금 우리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가족을 사유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사유화가 어떤 방식으로 자본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지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비판하는 ‘가족주의’는 자신과 관계를 사유화하려는 모든 찌질하고 편협한 욕망들이지 가족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가족이냐 탈가족이냐가 아니라, 가족을 탈주하게 할 것인가, 욕망을 가족으로 환원할 것인가다. 즉 욕망을 자본화할 것인가, 분열증화할 것인가.”(채운샘 강의안 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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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0 19:25
    대피소를 떠올릴 때, 그만 덫에 걸리고 마는 것이군요. 모든 사건의 원인을 저 바깥에 둘 떄, 믿을 것 역시 바깥에 있다고 생각할 때, 만약을 대비한 대피소는 현재를 옥죄는 사슬이 되나 봅니다.
    욕망의 분열증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