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천도 2~4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12-10 15:42
조회
56
夫帝王之德, 以天地爲宗, 以道德爲主, 以无爲爲常. 无爲也, 則用天下而有餘. 有爲也, 則爲天下用而不足. 故古之人貴夫无爲也. 上无爲也, 下亦无爲也, 是下與上同德, 下與上同德則不臣. 下有爲也, 上亦有爲也, 是上與下同德, 上與下同德則不主. 上必无爲而用天下, 下必有爲爲天下用, 此不易之道也. 故古之王天下者, 知雖落天地, 不自慮也. 辯雖彫萬物, 不自說也. 能雖窮海內, 不自爲也. 天不産而萬物化, 地不長而萬物育, 帝王无爲而天下功. 故曰莫神於天, 莫富於地, 莫大於帝王. 故曰帝王之德配天地. 此乘天地, 馳萬物, 而用人羣之道也.

 

제왕의 덕은 천지를 근본으로 삼고, 도덕(道德)을 주인으로 삼고, 무위(無爲)를 항상된 실천으로 삼는다. ‘무위하면 천하를 쓰고도 남는 것이 있고, 유위(有爲)하면, 천하를 위해 쓰고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은 무위를 귀하게 여겼다. 윗사람이 무위를 행한다고 해서 아랫사람 또한 무위를 행하면,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면 신하 노릇을 할 수 없다. 아랫사람이 유위를 행한다고 해서 윗사람 또한 유위를 행하면,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면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다. 윗사람이 반드시 무위를 행하여 천하를 쓰고, 아랫사람이 반드시 유위를 행하여 천하를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또한 바꿀 수 없는 도(). 그러므로 옛날 천하를 다스린 왕은 지식이 비록 천지를 포괄하지만 스스로를 고집하지 않는다. 말재주가 비록 만물을 논할 만하지만 스스로 설명하지 않는다. 능력이 비록 사해에 막힘이 없어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하늘이 낳지 않아도 만물은 저절로 자라고, 땅이 키워주지 않아도 만물은 저절로 길러지며, 제왕이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천하가 잘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보다 신묘한 것이 없고, 땅보다 풍부한 것이 없고, 제왕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제왕의 덕()은 천지와 나란히 한다.” 이것이 천지를 타고, 만물을 몰아서 사람의 무리를 부리는 방법이다.

 

〈천도〉편의 포인트는 무위(無爲)의 정치입니다. 이 장에서도 ‘무위’의 정치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간중간 화육지공(化育之功)과 같이 《도덕경》과 통하는 글자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상(常)은 ‘무위’의 특징 중 하나를 설명하는 단어로, 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용천하(用天下)는 ‘천하를 쓰는 것’이고, 위천하용(爲天下用)은 ‘천하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우쌤은 목적과 의도가 없는 정치와 그것들이 있는 정치로 구분해주셨습니다.

동덕(同德)은 ‘같은 역할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本在於上, 末在於下. 要在於主, 詳在於臣. 三軍五兵之運, 德之末也. 賞罰利害, 五刑之辟, 敎之末也. 禮法度數, 形名比詳, 治之末也. 鐘鼓之音, 羽旄之容, 樂之末也. 哭泣衰絰, 隆殺之服, 哀之末也. 此五末者, 須精神之運, 心術之動, 然後從之者也.

 

근본은 윗사람에게 있고, 말단은 아랫사람에게 있다. 핵심은 군주에게 있고, 상세한 것은 신하에게 있다. 삼군과 다섯 종류의 병기를 운용하는 것은 덕()의 말단이다. 상벌과 이해, 다섯 가지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교화의 말단이다. 예법을 헤아려서 조항을 만들고, 실적과 명분을 비교해서 상세히 하는 것은 다스림의 말단이다. 종과 북의 소리, ·무관이 추는 무용은 음악의 말단이다. 통곡하고 흐느끼고 상복을 입는 것과, 줄인 옷을 입는 것은 애도의 말단이다. 이 다섯 가지는 정신(精神)의 운행과 마음 작용의 운동을 기다린 이후에야 따라가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구체적인 ‘무위’정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릴 때 어찌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본(本), 요(要)는 군주의 정치에, 말(末), 상(詳)은 신하의 정치에 해당하는 글자입니다.

수(須)는 ‘모름지기’라는 뜻으로 자주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기다리다’라는 뜻의 대(待)와 통용됩니다.

심술(心術)은 ‘마음 작용’을 뜻합니다.

 

末學者, 古人有之, 而非所以先也. 君先而臣從, 父先而子從, 兄先而弟從, 長先而小從, 男先而女從, 夫先而婦從. 夫尊卑先後, 天地之行也, 故聖人聚象焉. 天尊地卑, 神明之位也. 春夏先, 秋冬後, 四時之序也. 萬物化作萌區有狀, 盛衰之殺, 變化之流也. 夫天地至神, 而有尊卑先後之序, 而況人道乎. 宗廟尙親, 朝廷尙尊, 鄕黨尙齒, 行事尙賢, 大道之序也. 語道而非其序者, 非其道也. 語道而非其道者, 安取道!

 

말단을 배우는 사람이 옛사람 중에도 있지만, 우선시하는 바가 아니었다. 군주가 앞서고 신하는 뒤따르며, 아버지가 앞서고 자식이 뒤따르며, 형이 앞서고 아우가 뒤따르며, 연장자가 앞서고 어린 사람이 뒤따르며,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뒤따르며, 남편이 앞서고, 아내가 뒤따른다. 무릇 앞서는 것을 높이고, 뒤에 오는 것을 낮추는 게 천지의 운행이니, 그러므로 성인은 상()을 취한 것이다. 앞서는 것을 높이고, 뒤에 오는 것을 낮추는 것이 신명(神明)한 도()의 작용이다. 봄과 여름이 앞서고, 가을과 겨울이 뒤따르는 것이 사계절의 차례이다. 만물이 변화하고 길러서 싹트고 분류하는 모양이 있으니, 성대함과 쇠약함의 순서는 변화의 흐름이다. 천지는 지극히 신묘하면서도 앞서는 것을 높이고 뒤따르는 것을 낮추는 차례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길에 있어서랴! 종묘에서는 친척을 숭상하고, 조정에서는 존귀함을 숭상하고, 마을에서는 연장자를 숭상하고, 일을 집행할 때는 뛰어난 능력을 숭상하는 것이 위대한 도()가 펼쳐지는 과정이다. ‘에 대해 논하면서도 절차를 따지지 않으면 가 아니다. ‘에 대해 논하면서도 마땅한 가 아니라면 어디서 를 취할 것인가!

 

이 구절에서는 자연으로부터 질서를 유추하는 상(象)과 상(狀)과 같은 단어와, 선(先)과 종(從), 존(尊)과 비(卑)의 다양한 관계들이 나오면서 《주역》 〈계사전〉과 매우 흡사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각각의 것들이 제자리에 위치하는 것을 위(位)라는 글자로 표현하면서 자연의 질서에 따른 정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서(序)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만물이 펼쳐지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자연의 질서에 따르지 않는 정치는 비(非)라는 글자로 표현합니다.

 

是故古之明大道者, 先明天而道德次之, 道德已明而仁義次之, 仁義已明而分守次之, 分守已明而形名次之, 形名已明而因任次之, 因任已明而原省次之, 原省已明而是非次之, 是非已明而賞罰次之, 賞罰已明而愚知處宜, 貴賤履位. 仁賢不肖襲情, 必分其能, 必由其名. 以此事上, 以此畜下, 以此治物, 以此修身, 知謀不用, 必歸其天, 此之謂大平, 治之至也.

 

이런 까닭에 옛날에 위대한 도()를 밝힌 이는 먼저 천도(天道)를 밝히고 와 덕()은 그 다음이었고, 이미 을 밝혔으면 인()과 의()가 그 다음이고, 이미 과 의를 밝혔으면 본분을 지키는 것이 그 다음이고, 본분을 지키는 것을 이미 밝혔으면 실적과 명분이 그 다음이고, 실적과 명분을 이미 밝혔으면 직책에 따라 일을 맡기는 것이 그 다음이고, 이미 직책에 따라 일을 맡기는 것을 밝혔으면 근원을 성찰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이미 근원을 성찰하는 것을 밝혔으면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이 그 다음이고, 이미 시비를 가리는 것을 밝혔으면 상벌을 가리는 게 그 다음이다. 이미 상벌을 가리는 것을 밝혔으면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가 마땅한 곳에 처하고, 귀한 이와 천한 이가 제자리에 머무른다.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실상에 맞으면 반드시 그 능력에 따라 나뉘고, 반드시 그 직책에 맞게 행해진다. 이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고, 이것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기르며, 이것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고, 이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닦고, 지모(知謀)는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자연의 도()로 돌아가니 이를 일러 태평(太平)이며 다스리는 것의 지극함이라 한다.

 

인임(因任)은 ‘직책에 따라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원성(原省)은 ‘근원, 책임을 따지는 것’입니다.

천(天)은 자연지도(自然之道)를 뜻합니다.

 

故書曰: 有形有名. 形名者, 古人有之, 而非所以先也. 古之語大道者, 五變而形名可擧, 九變而賞罰可言也. 驟而語形名, 不知其本也. 驟而語賞罰, 不知其始也. 倒道而言, 迕道而說者, 人之所治也, 安能治人! 驟而語形名賞罰, 此有知治之具, 非知治之道. 可用於天下, 不足以用天下, 此之謂辯士, 一曲之人也. 禮法數度, 形名比詳, 古人有之, 此下之所以事上, 非上之所以畜下也.

 

그러므로 책에서 말하기를 실적이 있으면 명분이 있다고 했으니, 실적과 명분은 옛사람에게도 있었으나,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 위대한 도()를 말하는 자는 다섯 번 변한 뒤에야 실적과 명분을 시행할 수 있었고, 아홉 번 변한 뒤에야 상과 벌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실적과 명분을 말하는 것은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느닷없이 상과 벌을 말하는 것은 시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를 뒤집어서 말하고, ‘를 거슬러 설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을 것이니, 어찌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느닷없이 실적과 명분, 상과 벌을 말하는 것, 이것은 정치의 도구를 안다고 해도, 정치의 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하에 쓸 수 있을지언정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니, 이를 일러 변사(辯士)라고 하고, 한 귀퉁이에만 전념하는 사람이라 한다. 예법을 상세하게 조정하고, 실적과 명분을 비교하여 상세히 하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으나,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방법이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기르는 위함은 아니다.

 

이 부분까지 제왕지덕(帝王之德)을 주제로 전개된 문장입니다. 우쌤은 〈천도〉 첫 구절부터 여기까지를 하나의 이어진 글로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형명참동(刑名參同)은 한비자의 법치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형(形)은 ‘실제로 드러나는 행동’이고, 명(名)은 ‘일을 진행하기 위한 명분’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는지를 비교하는 것이 법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취(驟)는 ‘느닷없이’라는 뜻으로, 단계와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정치를 말합니다.

도(倒)는 ‘거꾸로 하다’, 오(汻)는 ‘거슬러 올라가다’라는 뜻으로, 둘 다 도(道)에 거스르는 정치를 말합니다.

치지구(治之具)는 ‘수단만 알고 근본은 알지 못하는 정치’이고, 치지도(治之道)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다스리는 정치’입니다.

일곡(一曲)은 ‘한 부분’으로 《중용》에 나온 치곡(致曲)과 달리 부정적으로 쓰였습니다.

 

昔者舜問於堯曰: 天王之用心何如?

堯曰: 吾不敖無告, 不廢窮民, 苦死者, 嘉孺子而哀婦人. 此吾所以用心已.

舜曰: 美則美矣, 而未大也.

堯曰: 然則何如?

舜曰: 天德而出寧, 日月照而四時行, 若晝夜之有經, 雲行而雨施矣.

堯曰: 膠膠擾擾乎! , 天之合也., , 人之合也.

夫天地者, 古之所大也, 而皇帝堯舜之所共美也. 故古之王天下者, 奚爲哉? 天地而已矣.

 

옛날에 순()이 요()에게 물렀다. “천자께서 어떤 마음 씀씀이를 하고 계십니까?”

요가 말했다. “나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들에게 오만하게 굴지 않고, 살 길이 막힌 시민들을 저버리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과부를 애도한다. 이것이 내가 마음을 쓰는 방법이다.”

순이 말했다. “아름답기는 아름답습니다만, 아직 위대한 것은 아니군요.”

요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순이 말했다. “[군주는] 천덕(天德)과 합하여 고요히 드러내고, 해와 달이 지상을 비추고 사계절이 운행되며, 낮과 밤이 변하는 규칙성과 구름이 움직이고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요가 말했다. “[내가 세상일에] 집착하여 시끄럽게 했구나! 그대는 하늘과 합한 수준이고, 나는 사람과 합한 수준이구나.”

 

고(告)는 ‘억울함을 하소연하다’라는 뜻입니다.

궁민(窮民)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백성’이란 뜻입니다.

출녕(出寧)에서 출(出)은 하늘과 같이 하는 군주의 덕이 땅에 드러난다는 뜻이고, 녕(寧)은 ‘고요하다’라는 뜻으로 정(靜)과 통용됩니다.

조(照)는 해와 달이 지상을 비추듯 하나도 빠짐없이 비추는 것을 뜻합니다.

경(經)은 자연이 운행하는 일정한 규칙성을 뜻합니다.

교교(膠膠)는 ‘집착하는 모양’이고, 요요(擾擾)는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孔子西藏書於周室. 子路謀曰: 由聞周之徵藏史有老聃者, 免而歸居, 夫子欲藏書, 則試往因焉.

孔子曰: .

往見老聃, 而老聃不許, 於是繙十二經以說.

老聃中其說., : 大謾., 願聞其要.

孔子曰: 要在仁義.

老聃曰: 請問, 仁義, 人之性邪?

孔子曰: . 君子不仁則不成, 不義則不生. 仁義, 眞人之性也, 又將奚爲矣?

老聃曰: 請問, 何謂仁義?

孔子曰: 中心物愷, 兼愛无私, 此仁義之情也.

老聃曰: , 幾乎後言! 夫兼愛, 不亦迂乎! 无私焉, 乃私也. 夫子若欲使天下无失其牧乎? 則天地固有常矣, 日月固有明矣, 星辰固有列矣, 禽獸固有群矣, 樹木固有立矣. 夫子亦放德而行, 循道而趨, 已至矣., 又何偈偈乎揭仁義, 若擊鼓而求亡子焉? , 夫子亂人之性也!

 

공자가 서쪽으로 가서 주나라 왕실에 책을 보관하려고 했다. 자로가 이렇게 모의했다. “제가 듣기에 주나라의 책을 관리하는 사람 중에 노담이란 자가 있는데, [지금은] 사직하고 고향에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책을 보관하시려고 한다면 시험 삼아 그에게 가서 부탁하시지요.”

공자가 말했다. “좋은 의견이다.”

가서 노담을 보았는데, 노담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가져간 12경전을 펼쳐놓고 설명했다.

노담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너무 장황하니 요점만 듣고 싶소.”

공자가 말했다. “요점은 인의(仁義)에 있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묻건대, ‘인의란 사람의 본성이오?”

공자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군자가 하지 않다면 [자신을] 이룰 수 없고, ‘롭지 않다면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의는 참으로 사람의 본성이니, 또 장차 무엇을 하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묻건대, 무엇을 일러 인의라 하오?”

공자가 말했다. “마음으로부터 만물을 기꺼워하고, 두루 사랑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것, 이것이 인의의 실질입니다.”

노담이 말했다. “아이고, 뒤에 한 말이 위태롭구나! 무릇 두루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사사로움이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이 사사로움이다. 그대는 진실로 천하의 사람들이 자기 본성을 잃음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가? 천지는 진실로 항상됨이 있고, 해와 달은 진실로 밝음이 있고, 별들은 진실로 질서가 있고, 금수는 진실로 고유한 무리가 있고, 수목은 진실로 서있는 곳이 있다. 그대는 또한 덕()을 따라 행동하고, ()에 순응하여 쫓아가면 이미 지극한 것이다. 또 어찌 인의를 표방하는 데 힘써서 마치 북을 두드리며 잃어버린 자식을 찾듯이 하는가? , 그대는 사람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소!”

 

공자와 노담(혹은 노자)의 만남에 대해서는 《사기》 〈공자세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만남은 공자가 젊었을 적 주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 이루어졌다면, 여기서는 공자가 은퇴한 노담을 초나라로 찾아가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둘의 만남에 대해 어느 기록이 진짜인지 따지기보다 공자와 노담의 만남을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징장사(徵藏史)에서 징(徵)은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책을 구하고, 보관하는 사관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도서관 사서입니다.

인(因)은 ‘부탁하다’라는 뜻에서 통(通)과 통용됩니다.

중기설(中其說)은 도중에 끼어들어서 말을 자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태만(大謾)을 ‘지나치게 방황하다’로 해석했는데, 만(謾)에는 ‘속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방황하다’로 하지 않고도 본성을 해친다는 것을 강조하여 ‘지나치게 속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목(牧)은 ‘본성대로 사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방(放)은 ‘의지하다’라는 뜻으로 의(依)와 통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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