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수중전 시즌2 역사강의 6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2-13 18:25
조회
53
171206 수중전 후기

후기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ㅜ

수중전 시즌2 역사강의 6강 후기

<사통>을 지은 유지기에게는 사마천의 <사기>가 너무 긴 시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못마땅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만ㅋ) 왜냐하면 긴 시간을 다루게 되면 아무래도 정확도가 떨어지고 텍스트 내에서도 모순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마광의 <자치통감>의 경우, 주 무열왕(기원전 403년)부터 오대 周 세종(959년)까지 1362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글자수만 300만자, 총 354권의 대작! 분명 긴 시기를 다루는 것은 많은 품이 들 뿐더러 단대사를 짓는 것보다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사마광이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사마광은 어쩌다 이런 책을? 왜 이렇게 긴 세월을 고찰하여 역사를 쓰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5대 10국이라는 아수라장을 거친 이후 宋이 세워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나라 말기는 절도사들의 난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면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나라들이 일어났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했지요. 5대는 말할 것도 없고 10대는 정말 이름도 제대로 추릴 수 없는 나라들이 난립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오랑캐라며 무시해 왔던 거란족은 점점 세를 키워가고 있지요, 겨우 세워놓은 宋왕조도 풍전등화지요,(송은 8대를 못가 거란에 의해 망합니다.) 이런 시대에 사마광은 지난 시대를 한번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자치통감>의 특징적인 태도로는 天命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왕조의 운명은 과연 천명인가? 사실 송대까지 나라를 뒤엎은 것은 천명을 받은 군주가 아닌, 모두 군벌, 여진족, 용병들과 같은 무력집단들이었지요. 이런 상황 앞에서 천명을 곧이곧대로 믿기란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마광은 송의 운명은 어떠할지, 과연 중국에 정통 왕조가 이어지는 것은 가능한가? 어떤 법칙이 있는 건가? 하는 의문 속에서 길고 긴 역사를 조망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자치통감(資治通鑑)>, 풀이하면 ‘다스림의 바탕이 되는 통사의 거울’이라는 뜻의 책이 집필됩니다.

<자치통감>은 주 무열왕부터 다루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기원전 481년, 춘추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가 끝나는 것은 여러 설이 있는데요, 사마광은 진나라가 조, 한, 위나라로 나뉘는 시기, 대부가 공식적으로 제후가 될 수 있게 된 시기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공식적인 정치적 변동이 있다는 것을 중시한 것이죠.
역사를 쓸 때 어느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라고 합니다. 무엇을 정통으로 보느냐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광은 정통 왕조와 함께 윤달처럼 끼어드는 왕조, 그리고 참람하는 참위 왕조를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했다고 합니다. 진-한-위-진-북위-북주-수-당...이 정통이라면 그것과 준하는 진-촉-오-제-양 과 같은 왕조는 윤위, 그리고 5호 16국 같은 왕조는 참람했다고 보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사마광은 구양수의 정통단절론에 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통은 단절되기도, 하지만 이어지기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왕조가 대등하지 않다는 사마광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과 대조되는 것이 주희의 무통(無統)론인데요, 여러 정권을 함께 서술하면서, 정통은 끊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마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라고 합니다. 김부식 역시 삼국의 모든 역사를 다루었으니까요.

사마광은 구양수, 소동파, 왕안석, 정의천과 동시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문사철의 최고봉이 나서 모든 것을 집대성하는 시대를 살았던 것이죠. 군벌이 난립하던 시대가 정리되고 세워진 송나라는 문인정부를 추진합니다. 과거제를 실시하고, 역사 관련 전문 기구를 설치하여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장려하지요. 그때 사마광이 영종의 지원을 받아 <자치통감>을 집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065년 집필이 시작된 <자치통감>은 1084년에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런 거대사가 조정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발간되는 것은 처음이라, 사마광은 나름의 매뉴얼을 마련합니다. 총목(叢目), 즉 조교들이 수집한 자료를 연월일로 배열하고, 장편(長篇), 분류된 자료를 기반으로 초고를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수를 사마광은 전부 다 보았다고 합니다. 형식은 춘추필법을 따라, 그 일이 당시 상황에 적합했는지를 포폄(褒貶)하는 방식으로 적었습니다. 이는 공자의 정명론을 계승한 것이자, 의리를 중시한 서술이었습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지을 때 정사 이외의 참고서적 322종 이상을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사마광의 특이한 점은, 아무리 실록에 적힌 사실이라 하더라도 신빙성이 없으면 취하지 않았고, 또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개연성인지는 따로 또 기준을 봐야 합니다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백성들의 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그의 주장에 비춰보아, 단지 사실의 나열이 아닌 더 많은 정황증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사마광의 원수(?)는 왕안석이었습니다. 왕안석의 변법에 반대하고, 왕안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낙양으로 모든 짐을 싸고 내려가 작업하기까지 하지요. 심지어 <자치통감>에서 조 무령왕의 호복 정책과 상앙의 변법을 삭제하기까지 했답니다. (!) 제도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사마광이었기에, 왕안석과 근본적으로 뭔가 안 맞는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내막은 잘 모르겠어요^^;;

<자치통감>의 구조는 一代一紀로, 총 16왕조를 기술합니다. 워낙 분량이 방대하다보니 기록하는데도 원칙을 세웠다고 해요. 가령, 즉위년 다음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든가, 夏의 寅月을 정월로 삼는다든가(기록마다 정월이 다 달랐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치통감>은 역사를 기술하는 기준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양에서 역사는 곧 <자치통감>을 일컬을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역사책은 이제 <자치통감> 전과 후로 나뉩니다. 관련 서적이 마구 쏟아지지요. 특히 그중 <통감절요>라는 책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치통감>의 전문을 그대로 수록하면서 50권으로 줄였으니까요. 그러다보니 분량이 넘쳐나는 <자치통감> 자체보다는 <통감절요>를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다산도 요즘 애들은 <통감절요>만 본다고 한탄했을 정도ㅋ 그밖에 <자치통감>을 사건 중심으로 개편한 <통감기사본말>, 주자와 그의 제자 조사연이 주제문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한 <자치통감강목>이 주요 관련서적입니다. 이렇게 한 시기에 나온 역사서에 대한 많은 해석과 정리가 이루어진 것은 <자치통감> 자체의 주제의식이 그만큼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통치의 정통성에 대한 부단한 물음과 그것을 계속해서 과거라는 거울에서 찾고자 하는 성실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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