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수중전 시즌2 역사강의 5강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2-05 03:26
조회
170
요즘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있는데, 재미는 있지만 막상 정리하면서 읽으려고 하니 참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자료가 방대해서 시간과 중요한 사건을 정리하면서 읽지 않으면, 이때 황제, 태후 장군 등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어떤 정치적인 상황이 흐르고 있는지 잘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사기는 한 번 쭉 읽은 다음에도 자기 나름대로 주제별로 각 편을 정리하면서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지기는 사마천의 이러한 저술을 비판합니다.

사마천은 오제부터 자신이 있는 시대까지 중국의 역사를 통째로 아우르는 거대 통사를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유지기는 역사가라면 방대한 자료를 쭉 늘어놓는 게 아니라 어느 특정시기에 집중해서 서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자신만의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간략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지기는 《사기》와 《한서》뿐만 아니라 《춘추》, 《좌전》, 《국어》 등 이전의 저작들의 장단점을 살피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역사서술의 객관성, 즉 엄밀히 논증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쌤은 유지기의 역사서술 자체에 대한 이러한 물음 속에서 중국의 역사‘학’이 탄생했다고 하셨습니다. 유지기는 역사적 글쓰기를 위해 별도의 훈련을 받아야 하며 그 자격으로 사재(史才)와 사학(史學), 사식(史識)을 말합니다. ‘사재’에서 재(才 )란 타고난 능력을 말하는데, 우쌤은 이것을 갈고 닦아 현실에 잘 쓸 때의 능력을 재(材)라고 표현한다고 하시면서 부연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사학’에서 학(學)이란 배움, 학문을 뜻합니다. 물론 사관으로서의 훈련 같은 것은 사마천의 시대에도 있었지만, 유지기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기만의 관점, 비판적인 안목으로서의 ‘사식’을 말합니다. ‘사식’에서 식(識)은 통찰력으로서 당시 어마어마하게 쌓인 텍스트를 분별하는 안목입니다. 갑자기 서양의 투퀴디데스나 랑케가 생각나네요. (사실 랑케는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ㅎㅎ;;) 투퀴디데스는 ‘신화’와 같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걸 경계했고,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얘기한 사람이었습니다. 랑케는 그런 투퀴디데스의 역사적 글쓰기로부터 서양에서 역사‘학’을 얘기한 사람이었죠. 강의를 듣다가 갑자기 생각난 건데, 투퀴디데스 혹은 랑케의 글과 유지기의 글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양쪽 다 ‘사실’을 중시했지만, 동양에서 사실이란 봉황이나 기린과 같이 허구적인 요소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양의 사실과는 똑같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교하다보면 무엇을 사실로 보는지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과정에서 그 시대의 사회를 명확히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지기의 이름을 살펴보면, 지기(知幾), ‘기미를 알다’란 뜻입니다. 실제로 어떤 뜻으로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유지기는 당나라 측천무후 때부터 현종 때까지의 관리입니다. 사관이긴 했지만, 당시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ㅋㅋ 그건 유지기가 게을렀다기보다 당시 사관의 작업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관은 그 시대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록하고, 그것이 널리 퍼지지 않도록 철저한 입단속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사관제도가 도입된 초기에는 보통 잘 안 지켜진다고 합니다. ^^;; 이세민이나 측천무후, 이방원은 자기가 사관을 설치해놓고도 수시로 기록을 보려 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유지기의 상관은 기록한 내용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고, 기록을 살펴보는 고위 감수자가 너무 많았다고 합니다. 유지기가 《사통》을 지은 것은 이런 시대적인 상황도 반영됐을 것입니다.

이제 《사통》의 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사통》은 내편 36편(총 39편이긴 하나 3편은 소실됐습니다.)과 외편 13편으로 구성됐습니다. 우쌤은 내편에서도 전반 12편이 중요하고, 외편의 13편은 이때의 주장을 보충하는 내용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지기는 《사기》보다는 《한서》를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유지기가 보기에 《한서》가 더 일관되게 정리됐기 때문입니다. 《사기》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뼈대로서의 기록이라 할 만한 본기에 진(秦)나라, 항우, 여태후가 들어가고, 제후들의 기록인 세가에는 진승, 소하, 조삼이 들어가 있습니다. 진(秦)나라는 그 자체로 통일국이 아닌 까닭에 엄밀히 따지면 세가에 들어가야 하고, 항우와 여태후 또한 정식황제가 아닌 까닭에 열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진승은 스스로 봉기했을 뿐이고, 소하와 조삼 또한 공으로 봉지를 받았을 뿐 제후로 인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열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이질적인 기록을 넣은 것이야말로 사마천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 돋보이는 지점이지만, 유지기가 보기엔 이건 일관되지 않음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지기는 《사통》 내편 4편, 5편인 본기와 세가에서 반고는 항우, 소하, 조삼을 열전에 넣음으로써 사마천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6편인 열전에서는 사마천이 본기는 편년체로 기록하고, 열전은 사건을 위주로 기록했다고 해서 기록하는 방식이 일관되지 않았음을 비판합니다. 8편은 서지(書誌)인데, 유지기는 의학, 언어, 대도시의 지리와 인구, 부족, 물건 사용 등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우쌤은 이러한 정리과정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등장한다고 하셨습니다.

9편은 논찬(論贊)으로 유지기가 생각하는 사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편입니다. 유지기는 역사적 글쓰기는 변려문과 같은 문인들의 글쓰기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문인의 글쓰기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역사서라는 입장에서 공자, 좌구명, 사마천, 반고, 진수 등등 이전의 무수한 역사가들은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유지기는 역사가의 글이란 의혹을 변별하고 막힌 곳을 풀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 문장력을 자랑한다든가 핵심을 보여주는 간결한 문체가 아닌 문장의 반복과 같은 문체는 역사가의 글쓰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외편의 1편은 사관건치(史官建置)라는 제목으로 사관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 유래와 임무를 설명하는 편입니다. 유지기는 스스로 통사를 비판하긴 했지만 통사에 대한 욕망 자체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편에서도 그는 복희씨로부터 사관의 역사를 설명해나갑니다. 이 편에서 재밌던 부분은 여사(女史)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사관이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고 해도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기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등장한 것이 궁녀들 중 일부를 사관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그렇게 훈련된 궁녀들을 ‘여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2편은 고금정사(古今正史)로 고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사(正史)의 특징을 기록 및 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지기는 시간 순으로 사건을 열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편은 의고(疑古), 즉 과거의 정사기록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여기에 10가지의 의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만 말해보면, 요에서 순, 순에서 우로 향하는 선양이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유지기는 의심합니다. 우쌤도 얘기하셨지만, 회계산에서 왜 그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 순의 무덤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이들이 서로에게 왕위를 건넨 것은 덕에 의한 선양이 아니라 부족 싸움의 결과로 패자는 먼 곳으로 유배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비슷하게 우의 아들 계가 왕위에 오른 것도 라이벌인 익을 살해한 것일 수도 있고, 이윤에 의해 동궁에서 반성문 썼던 태갑도 이윤을 살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걸주가 정말 포악한 인물이었는지 반대로 주공은 현명한 인물이었는지 등등 고대 정사에서 아름답게 그려지는 이야기를 유지기는 세심하게 의심합니다. 깐깐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저술하기 위해 얼마나 반복해서 텍스트를 읽어야했을지 항상 놀라게 됩니다. 또, 유지기는 반고와 진수를 사관의 표본으로 얘기했지만, 강의를 듣다보니 유지기는 사마천에 대한 존경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사기》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지만, 그러한 관심이야말로 《사기》라는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파급력에 대한 인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무언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애정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딴소리로 이번 (한껏 늦장부린)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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