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7.11 주역과 글쓰기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7-20 14:15
조회
128
2학기 마지막 시간을 마무리하는 후기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화요일이 됐네요. 후기를 쓰다 말다 하면서 며칠을 보내니 공부한 날의 여운이 많이 사라졌네요..;; 기억나는 것 위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윤리학으로서의 주역(周易)

조별 토론할 때마다 조원으로 누가 있느냐에 따라 진행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번 학기에 정랑쌤, 호진쌤, 정우쌤, 수정쌤과 함께 조별 토론하니, 확실히 이전 조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우쌤께서 항상 질문하셨던 게 생각나는데요. ‘이 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이고, 이 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질문을 따라 토론하다 보면, 거의 매시간 주역 공부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대략 이런 질문이 남은 것 같아요. ‘주역을 왜 공부하는 것인가?’, ‘하고 많은 텍스트 중에서 지금 우리가 주역을 읽는 독특함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현재 각자가 《주역》을 공부하면서 느낀 효용을 토대로 추리해봤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외부에서 찾지 않게 된다’, ‘물질적 쾌락이 채워줄 수 없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등등. 사실 저 질문에 대한 답은 공부하면서 계속 바뀔 것 같아요. 저는 질문에 대한 답보다 왜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 생각하게 됐는데요. 함께 공부하는 제가 봤을 때는, 당장은 《주역》을 재밌게 읽고는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읽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역》을 읽는 동안 딴짓 안 하고 정신 차리게 되지만, 《주역》이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신체에 새기게 되는 것에 대한 궁금함이 저희 모두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강의 때 채운쌤께서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역》을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새로운 실천 윤리를 위해서죠. 물론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호기심이 공부를 지속하는 큰 동력입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공부가 삶에 밀착되거나 인식에 균열이 생기지 않습니다. 가령,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등장하는 가족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요? 근대적 가족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모델입니다. 이때 부모의 헌신은 물질과 애정으로 드러납니다. 자식으로부터 정서적 위안을 얻는 것이 부모가 부모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공부한 가인괘(家人卦)를 보면, 거기에는 부모가 부모로서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식 덕분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각기 고유합니다. 남편이 집밖에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한다면, 아내는 집안에서 살림을 매니징합니다. 각각의 구성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하죠. 근대적 가족관과 매우 다른 배치죠. 이렇게 《주역》에는 근대적 삶의 배치를 낯설게 바라보고,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많습니다.

채운쌤은 이 밖에도 《주역》을 읽을 수 있는 여러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alternative 생태이론’, ‘주역과 과학’, ‘새로운 정치철학’ 등등이 있는데요. 하나하나가 1년 프로그램이 될 만큼 어마어마한 기획입니다. 이는 그만큼 《주역》이라는 텍스트가 다양하게 접속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죠. 결론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는 건데요. 채운쌤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다음 학기에는 괘 하나씩 잡고 풀어오기로 했잖아요? 각자의 문제의식을 벼리는 빡센 훈련이 될 것 같습니다.ㅎㅎ

 

무의식의 발견(feat. C. G. )

《주역》을 공부하면서 융은 어떻게든 꼭 한 번은 만나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에 거의 훓듯이 만나는 데 그쳤지만, 거기서도 《주역》을 독해할 수 있는 층위(?)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요.

융은 1875년 7월 26일에 태어나 1961년 6월 6일에 죽었습니다. 가끔 한 사람의 사유가 그가 살았던 시대와 공명한다는 걸 실감할 때가 있는데요. 융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양자역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학문이 탄생하는 시대였습니다. 양자역학은 그동안 통용되었던 거시세계의 개념(통계나 확률 같은)으로 설명되지 않는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즉, ‘있다’를 가정할 수 없는 학문입니다. 융의 사유도 양자역학과 공명합니다. 이번에 저희가 읽었던 텍스트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우리가 규정한 인과로 작동하지 않는 사건들에 주목합니다. 그 결과 ‘무인과적 사건’ 같은 용어도 사용하죠. 융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보기보다 근대 학문이 의지했던 인과율이란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운동이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풍뎅이’, ‘물고기’ 같은 이미지가 여러 곳에서 동시에 반복된다든가 감정이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런 예들이죠. 융은 이러한 예들을 통해 무의식 혹은 마음 같이 자연적 인과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탐구합니다.

융의 분석을 따라가면서 여러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중에서도 융이 말하는 ‘심리 혹은 감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더라고요. 융은 그것을 단순히 개체의 정신활동으로 국한시키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가령, “원래 본질적으로 지루한 이 실험에서 어떤 새로운 흥미가 불러일으켜질 수 있었을 때 그 결과들은 다시 향상되었다. 이 점으로부터 정서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도출된다. 하지만 감정 상태는 대부분 본능(instinct)에 달려 있으며, 그 형식적 측면은 원형이다.”(87)라는 구절을 보면, 특정한 감정은 모든 개체에 작동하는 정신으로서의 집단무의식에서 비롯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집단적 활동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잠깐 전개체적 실재성을 얘기한 시몽동이 떠오르긴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채운쌤은 집단무의식의 작동이 모든 개체에게 개체성을 넘어가는 집단적 차원의 에너지가 내재돼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셨죠. 그리고 감정은 그 개체가 어떤 에너지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표현합니다. 즉, ‘우리’가 있기 전에 에너지의 표현이 있다고 할 수 있죠. 여기서 채운쌤께서 자주 말씀하신 우리가 어떤 감정을 형성하고 있는지가 그 자체로 우주적 스케일에 참여하는 정치적 실천과 맞닿아있다는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소멸되더라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에너지장은 쉽게 소멸하지 않습니다. 형성력이 강한 에너지장일수록 더욱 그렇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에너지장을 형성하느냐 혹은 아예 반대의 에너지장을 형성하느냐입니다. 우리가 형성한 에너지장은 후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 선한 에너지장을 형성하는 게 윤리적·정치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여기서 ‘그 선함을 어떻게 아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는데, 저희가 공부하는 《주역》이 이 질문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좋은 힌트가 될 것 같습니다.

《주역》에서는 64괘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사건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죠. 그런데 이는 단순히 64개의 경우의 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융이 얘기한 원형, 집단적 차원의 에너지가 표현되는 패턴이라 할 수 있죠. 각각의 괘는 매우 구체적인 사건으로만 해석될 수 있지만, 괘 자체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토론 때 경험하셨겠지만, 하나의 괘는 각자의 문제의식 속에서 여러 구체적인 사건으로 다르게 읽힙니다(괘의 고도의 추상성은 그것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백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괘에서 제시하는 윤리도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죠. 그러나 어떤 윤리를 도출하든 괘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주의 정신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채운쌤께서는 ‘무의식이 발현하도록 하는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는 것’이라 하셨죠. 근데 후기를 쓰다 보니, 아직 저는 의식과 무의식을 대립적으로 사고하고 있더라고요. 무의식을 발현하려면 기존의 의식을 해체해야 하는데, 그게 어쩐지 의식의 작동을 중지시키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어쨌든 ‘자연을 따라 사는 것’=‘우주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나를 우주 에너지가 관통하는 문으로 만드는 것’이란 도식이 성립합니다. 채운쌤께서 이러한 사유가 고대 중국의 무아(無我),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와 공명한다고 설명해주셨는데, 그만큼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숙제인 것 같습니다. (장자에서 시비판단의 경계에서 판단하는 인식을 도추(道樞)라고 표현했는데, 뭔가 연결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풍화가인(風火家人), ‘통치는 집안을 매니징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인괘는 위에 손괘가 있고, 밑에 리괘가 있습니다. 항상 괘상(卦象)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운데, 정이천은 “바람이 불에서 나오는 모습”이고 집안의 도(道)를 확립해야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정치적 맥락으로 해석했죠. 그리고 채운쌤께서는 안에 있는 불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대체로 불은 자신의 중심을 비움으로써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덕성[麗]을 갖췄고, 바람은 어떤 것에도 들어갈 수 있는 유연함(?)[入]을 갖춘 것으로 해석되죠. 그러니까 실제로 타인과 연결되며 감화시키는 것이 풍화가인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여기서 유가적 통치의 독특함을 함께 짚어주셨죠. 통치는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포함하는데, 이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사고를 보여줍니다. 우선 나의 몸이 있고, 그 다음에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와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무엇보다 지금 나와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전에서 나왔듯이 언행(言行)이 실속 있고 항상돼야 합니다(君子以言有物而行有恒). 채운쌤은 말을 수식하는 물(物)을 circumstance로 번역하셔서, 말은 특정한 상황에서 발휘될 수 있는 구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죠. 그리고 항상된 실천은 말이 헛되지 않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풀어주셨습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이전에 ‘수신’이 있다는 것에만 주목했는데, ‘제가’ 또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나의 몸을 다스리는 과정은 실제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괘에서는 효들 간에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에 주목합니다. 가령, 상구효와 초구효를 부자관계로, 구오효와 육이효를 부부관계 등으로 해석합니다. 정이천은 이 중에서도 구오효와 육이효의 부부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데요. 채운쌤은 여기서 근대 가족의 모델과 상이한 새로운 가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셨죠. 근대 가족은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집안에서 자식을 키우며 살림을 도맡습니다.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죠.

하지만 《주역》에서 보여주는 부모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남편은 돈벌이나 정치활동에 힘쓰고, 아내는 집안 살림을 매니징합니다. 아내의 매니징은 단순히 생활비를 절약하고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배치를 어떻게 하고, 손님맞이를 누구에게 시킬지 등등 ‘집’-공간을 책임지는 리더의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근대 가족 안에서의 아내의 역량은 매우 축소화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을 매개로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했던 고대 중국의 아내와 달리, 근대의 아내는 집안에 갇혀서 아기를 돌보는 것만이 자신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입니다. 아내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남편도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대 중국에서 아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고대 중국의 아내는 위계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점에서 억압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리’에 대한 얘기도 하셨습니다. 단전에 공자의 정명(正名)사상이 돋보이는 구절이 있는데요(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而家道正).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는 것은 구성원들 각각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따로 고정돼있지 않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형이자 아우이고, 아버지이자 자식일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상하좌우관계를 인식해야만 윤리를 구성할 수 있죠. 즉, 윤리란 자신이 놓인 관계성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풍뢰익(風雷益), ‘통치란 위에서 덜어내어 아래에 베푸는 것이다

익괘는 위에 손괘가 있고, 밑에 진괘가 있습니다. 정이천은 익괘의 상을 효사의 운동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천지비괘에서 위에 있는 건괘가 자신의 양을 덜어내어 아래에 있는 곤괘를 증진시켰다고 해석하죠. 그러니까 이 괘에서는 위에서 덜어내어 아래에 채워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채운쌤은 여기서 고대 중국 통치의 독특함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래가 채워져서 두터워지면, 위도 자연스레 안정됩니다. 통치 관계로 보면, 백성의 삶이 안정돼야 군주의 권력도 보장됩니다. 잠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저희가 읽는 책에서는 익(益)을 ‘증진’으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채운쌤은 통치 이야기에 맞췄을 때 ‘증진’보다 ‘베풂’으로 번역하는 게 좀 더 정확하다고 하셨습니다.

익괘에서 말하는 베풂은 통치의 원리를 얘기하는 것이지만, 베풂이 극대화되는 상황도 함께 얘기합니다. 괘사에서 이섭대천(利涉大川)이 나온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주역》에서 ‘이섭대천’은 ‘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굳은 결단이 필요할 때’를 의미하죠. 물론 ‘이섭대천’도 괘마다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잘 살펴봐야 하지만요.^^;;

정이천은 익괘의 ‘이섭대천’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달았습니다. “익(益)의 도(道)는 아무 일도 없는 평상시에는 그 유익함이 오히려 작지만 고난과 위험에 당면했을 때에는 그 유익함이 매우 크므로,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그러니까 익괘는 ‘익’이 극대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채운쌤은 코로나 시국의 재난지원금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코로나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영업을 제한하고, 회사의 손실을 막기 위해 정리해고를 하는 등 많은 분들이 타격을 입었습니다. 재난지원금은 그분들이 이 시기를 넘어갈 수 있는 힘이 되는데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시는 저희 어머니도 코로나 때문에 받은 타격을 재난지원금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국가의 복지는 이런 시국에 더 피부에 와닿습니다. 국가가 없었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넘겼을까 싶기도 하고요.

통치자인 군자의 입장에서 익괘는 정치적 의미로 읽혔지만,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고민하는 철학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대상전의 “見善則遷 有過則改”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채운쌤은 이 구절을 ‘모든 사람을 나의 선(善)을 발명할 계기로 만들기’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가령, 공자가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거기에 분명 나의 스승이 있을 것이다. 그 선함을 택하여 좇고, 그 불선함을 고친다(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 《논어(論語)》 〈술이(述而)〉 21장).”라고 한 구절이 대표적 예입니다. 여기서 기(其)를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선·불선이 세 사람 중 선한 사람, 불선한 사람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그의 선함과 나의 불선함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저는 세 사람 중 선한 사람에게서 선을 실천할 단서를 얻고, 불선한 사람에게서는 나의 불선을 점검하는 기회를 얻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좋더라고요. 어쨌든 어디를 가든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선함을 발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전체 2

  • 2021-07-27 13:28
    방학 2주가 꿀처럼 달달한 시간인데 규창샘 후기 읽고 보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느껴지면서, 같은 시간에 같이 공부했는데 서로의 배움의 깊이가 확~ 다름이 느껴지는 후기네요. 주역을 공부하면서 기존의 개념들이 많이 흔들리는데 가인괘도 그중 대표적인 괘 같아요. 근대 이전의 여성이 지금보다 더 억압적이었다는 생각이 아직도 여전하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담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규창샘의 알찬 후기가 지금의 느슨함을 조이네요.

  • 2021-07-21 23:02
    지난 시간에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해 다소 느슨하게 마무리가 된 것 같아 아쉬웠는데, 이렇게 좋은 후기를 보니 제가 대충 스쳐갔던 대목들이 아주 리얼하고 절실하게 와 닿아 두세번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게다 올해 우리의 공부가 이제 절반을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왜 나는 주역을 공부해야하는가에 대해 다시 되뇌게 하면서 제 정신줄을 확 잡아당여주고 있네요. 대혜종고의 말씀처럼 머리 위에 붙은 불을 끄는 심정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올해의 발심도 여느 해처럼 싱겁게 흐지부지 되고 말리라는 것, 정녕 두려운 이 예감을 휙 날려버리기 위해서라도 다음 학기에는 더 용맹정진하겠노라 다짐해 보게 됩니다. 고마워요, 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