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0927 소생프로젝트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8-10-01 12:04
조회
89
0927 소생 프로젝트 후기

추석 연휴와 연구원들의 늦은 바캉스를 마치고 2주 만에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 주는 앙투앙 갈랑의 <천일 야화>와 키아로스타미의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를 함께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사이로>와 함께 길 삼부작으로 말해지는 영화의 하나입니다. 후기는 세미나와 강의를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천일야화>라는 책

천일 야화는 세에라자드가 술탄 샤리아에게 들려주는 천+하룻밤의 이야기입니다. 전권을 다 읽지는 않았어도 우리에게는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밧드의 모험 등으로 꽤 친숙하게 느껴지는 책이죠. 보통은 아라비아의 이야기정도로 알고 있고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동양’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하는데요.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의 영역, 심상지리는 생각보다 넓은 것이었어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의 동쪽인 카이로 터키 이란 인도를 차례로 정벌해 나가면서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는 영역을 동양으로 통칭해 인식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는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았고, 나머지는 이민족 바바리안으로 부르며, 그리스의 동쪽부터 동양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집트가 그 시작점이 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일야화의 이야기는 서양인이 보는 동양이라고 불리는 넓은 지역의 민담, 설화가 모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채집된 이야기들이 15세기에 이르러 이집트 카이로에서 아랍어로 처음 출판되었다고 해요. 최초 판본의 제목은 <천 개의 이야기>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랍 지역에서는 흥미를 갖지 않았다고 해요. 주변의 흔하디 흔한 얘기였기 때문이죠. 오히려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동양을 낯설고 이국적으로 느끼는 서양인들이었던 것이죠. 영국, 프랑스, 독일등지에서 번역본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때 제목이 <천 하룻밤의 이야기>로 바뀌어 나온 것이랍니다.

왜 천 개의 이야기가 1001개의 이야기로 천일에 ‘+1’을 한 것일까요. 여기엔 두 가지의 정도의 이유가 말해진다고 해요. 하나는, 무슬림들은 짝수를 불길한 수로 여긴다고 합니다. ‘+1’을 해서 짝수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이슬람에서 ‘천’은 무한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1’을 한 것은 일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무한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1’은 그 ‘영원성’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절묘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도 이와 관련해 문학은 ‘영원한 과정’이며 과정이란 삶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개인은 죽어 끝이 나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책을 읽다보면, 내일은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고 세에라자드가 매번 밑밥을 던지지만 정작 읽어보면 별다른 얘기가 없습니다. 모험과 상황이 조금 바뀔 뿐,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별 거 없이 반복되는 게 우리 삶이고 보면, 과정 자체가 영원한 것이겠지요. 과정으로서의 삶이 있을 뿐이라는 게 천일야화가 담고 있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절묘한 책의 제목을 뽑은 사람이 바로 앙투안 갈랑(1646-1715)입니다. 갈랑을 소개하며 샘은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요, 번역자에 따라 책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번역자의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 관념들이 투영되기 때문이고, 같은 언어도 뉘앙스를 어떻게 살리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창작이라는 것입니다. a의 언어도, b의 언어도 아닌 a-b 언어의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게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번역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말의 다양한 감수성까지 갖추어야 하므로 번역은 고도의 지성을 요구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랑의 제목은 책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탁월한 창작인 것 같습니다.

갈랑은 유럽인 최초로 천일야화를 번역한 사람입니다. 가장 많이 읽힌 번역판이기도 하고요. 갈랑이 살았던 17-18세기는 과학이 한창 발전하던 시기였고, 로코코 양식과 낭만주의가 공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의 프랑스는 가장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시대였다고 합니다. 갈랑은 당시 프랑스인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시대에 맞는 우아하고 품격 있는 번역을 했다고 합니다. 지나친 성적묘사를 제거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만들어,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살린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잘 하는 이슬람인을 대동해 원작에 없는 이야기까지 추가해 넣었다고 하니 갈랑의 천일야화는 그의 창작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천일야화는 갈랑을 비롯해 4가지 번역본이 많이 읽힌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 (1801-1879) 본은, 모든 성적 묘사를 소거하고 백과사전식 꼼꼼한 주를 달은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슬람 교도임을 자처 했다고 하는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1821-1890)은 이야기의 야만적인 색채를 되살렸다고 합니다. 현재는 버턴본이 많이 읽힌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노골적인 성묘사 등으로 아랍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했다는 평이 있는 마르드뤼의 번역이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한다는 것

천일야화의 많은 화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나 싶게 말이죠. 우리는 늘 이야기를 하고 살면서도, 이야기에 대해 무지하고 또 사고방식이나 이해는 소설의 플롯에 훨씬 가깝습니다. 사건엔 이해 가능한 인과가 있어야 할 것 같고, 시간적으로 쭉 나열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모든 것엔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삶이란 말도 안 되는 일이 훨씬 많고, 하루하루를 보면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위에서도 보았듯, ‘+1’이란 이 비슷한 삶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죠. 천일야화는 옛날에~를 가정하지만 역사성이나 시간성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인물들 역시 시간이나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반복과 순환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천일야화 안의 이야기는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이야기가 증식되는 구조인 거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명을 증식하는 것이고, 하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하루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야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타자화 할 때 가능해집니다. 어떤 일을 겪고 그것을 상처로 간직하지 않을 수 있는 자만이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자기 안에서 해소되지 않으면 원망과 한탄이 나오지 이야기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도 경험하지요. 해서 이야기가 치유 일 수 있습니다. 책에서도 이야기를 통해 세에라자드가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술탄 자신이 하루 하루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 난 왕비에 대한 원망으로 왕비를 죽이고, 매일 새 왕비를 맞아 초야를 치르고 죽이던 술탄은 그 과정에 자신도 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매일 세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야기를 하고 듣는 과정에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고 하니 술탄이 살아가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새삼 이야기꾼이 고귀해 보입니다. 세미나에서도 세에라자드가 매개자 이상의 존재일거란 토론이 있었는데요, 채운샘은 이야기꾼을 ‘기억 하는 자’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호메로스도 트로이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호메로스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트로이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로 불린다는 것이죠. 기억은 세계를 만듭니다. 불교에서는 세계란 기억이라고 한다는데요, 세계가 있어서 우리가 그 각각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억이 각각의 세계를 출연시킨다는 것이었어요. 그들은 눈먼 자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눈먼 자는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란 의미로 듣기를 특화시켜 말한 것이죠. 또 이야기 하는 자는 떠도는 자입니다.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만나고 들은 기억을 전파하는 존재이고 보면,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야기꾼이고 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란 늘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묵은 것을 털어내고 새로워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지요. 세에라자드가 죽음이 기다리는 왕비의 자리를 자처해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술탄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었네요. 이야기가 없다면, 누구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생은 끝이고 세계도 끝이 날 것입니다. 이야기꾼이 되기를, 모험에 나서기를 두려워 하지 않을 때 삶은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전체 3

  • 2018-10-01 12:45
    <천일야화>에서는 그 이야기꾼이 여성이네요. 이야기를 끝맺는 존재(이야기의 끝은 삶의 끝, 곧 죽음)가 아니라 무한히 이야기를 반복시키면서 새생명을 낳는 존재.
    '여성과 이야기꾼'에 대해서도 저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 2018-10-01 23:18
    자기 삶이 너무 중요하고, 그것만이 전부인 사람은 탁월한 이야기꾼이 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되네요.
    이야기는 자신의 삶을 객관화 할때,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
    저도 이야기꾼에 대해 새롭게 알게되었습니다!

  • 2018-10-02 15:55
    이야기에 대해 평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인류에게 그동안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게 또 이야기였네요. 왜 그렇게 이야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지 천일야화를 통해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요즘 우리는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네요. 어느새 관심이 이슬람에서 이야기로 옮겨진 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