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프로젝트 10월 4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10-01 13:11
조회
76
라오스에서 신나게 놀고 돌아와 보니 날씨가 쌀쌀해져있더군요. 그래선지 지금 연구실에서 콧물 훌쩍이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저도 살짝 감기가 올락 말락 하는데 모쪼록 이불 잘 덮으시고, 목 따뜻하게 하세요. 공부를 즐겁게 하려면 어쨌든 체력 아니겠습니까~! 공부도 하고, 신체 리듬도 챙기고! 소-생을 통해 계절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공지 내용부터 올리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천일야화》 2권과 《샤나메》 9장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천일야화》는 1권을 읽고 그랬던 것처럼 주목할 만한 지점을 잡고 분석을 해오시면 됩니다. 맞든 틀리든 그동안 배웠던 이슬람과 연결할 수도 있고, 각자가 생각하기에 반복되는 패턴을 잡으시면 됩니다. 단지 《천일야화》를 읽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이슬람, 이란을 만나는 걸 잊지 마세요. 저희는 여행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중이란 걸 염두에 두시고 계속 읽으시면 됩니다. 팀 과제인 《샤나메》와 《일리아스》를 어떻게 읽을지는 각 팀에서 얘기를 해주세요. 이번 주 간식은 민호와 혜림쌤, 후기는 저번 주에 빠졌던 지영쌤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이번 시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앞으로 《천일야화》를 만날 때 유념해야 될 몇 가지 지점들이었습니다. 우선 《천일야화》란 앙투안 갈랑이 붙인 제목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가 읽고 있는 《천일야화》는 보존된 이야기를 번역한 게 아니라 17~18세기 유럽 프랑스인의 시선으로 본 중동~페르시아 지역입니다. 사실 《천일야화》는 어느 것이 원본이랄 것도 없습니다. 각각의 지역마다 정리한 판본이 있고, 앙투안 갈랑이 참고한 카이로본은 281일 동안 약 40개의 이야기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1001일이 되고, 크고 작은 200~300개의 이야기로 정리된 것은 순전히 갈랑이 새로이 이야기를 넣고 다른 것들을 종합한 결과입니다. 대표적으로 ‘신밧드의 모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등의 유명한 얘기들은 원래 있었던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갈랑이 이슬람 학자의 얘기를 들으며 새로 첨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갈랑은 유럽인들에게 낯선 동양을 소개해주는 차원에서 《천일야화》를 정리했는데, 당시 우아함을 강조하던 로코코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적 묘사 같은 게 최대한 자제됐습니다. 그리고 삽화를 보면 주로 인물들이 주로 흑인으로 그려지는데, 이것도 당시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범주 중 이집트가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갈랑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 리처드 프란시스 버턴 등 이후로 《천일야화》를 정리한 사람들도 각각 자신이 서있는 시공간을 은연 중에 반영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재밌었던 점은 《천일야화》의 이야기 방식에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천일야화》는 크게 셰에라자드가 샤리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려주는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가 생겨나고, 또 그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끊임없이 증식되는 구조가 있었죠. 고대 중국에서 ‘9’가 꽉 찬 숫자이듯, 아랍권에서 ‘1000’이란 숫자는 무한(∞)을 뜻합니다. 채운쌤은 제목이 단순히 ‘1000’가 아니라 ‘1000’ + ‘1’인 것을 두고 무한이 반복된다고 해석해주셨습니다. 무한이 반복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뜻할까요? 보르헤스는 문학을 영원한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승전결의 플롯에 익숙해져있지만 사실 문학이란 등장인물과 상황만이 바뀔 뿐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라는 얘기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계속해서 상황만 바뀔 뿐 끊임없이 사건을 겪게 됩니다. 이런 삶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끝나는 편안한 보금자리 같은 곳은 없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은 나를 소비하고, 병들게 하는 여행입니다. 따라서 힘들지 않은 삶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삶에 직면했을 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삶이란 신들의 유희’라 생각했죠. 고통에 대한 이유를 찾고, 삶을 나아질 것이란 기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이었던 것이죠. 비슷하게, 무한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역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한 그들의 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겪는 고통을 나만의 것이라 특권화시키지 않고 보편성으로 이해하는 기술. 이야기는 여기서 치유의 힘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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