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지은팀] 예술인류학 5주차 후기

작성자
김지현
작성일
2018-12-11 00:37
조회
146
  1. 신성함의 차원, 그곳으로 가는 열쇠.


이번 강의 시간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간의 삶 속에 ‘성스러운 면’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성함’, ‘성스럽다’라는 표현은 고대 예술품을 설명하는 책 속의 수식어로 화석화된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석덕분에 한때나마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삼엽충, 시조새, 공룡처럼 ‘신성함’도 고대사회나 유물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직장상사와 제가 속한 팀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직장에서 하는 회식을 전 부담스러워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하나마나한 공허한 말에 웃음 지으며 앉아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회사일과 관련된 주제는 질려서 피하고 싶고, 사생활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데 그것이 아닌 다른 주제를 찾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어떤 얘기를 해도 두 문장을 넘지 못하고 회사일로 회귀하고야마는 대화들. 주제가 빈약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분야는 아예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물리학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화가들은 과학, 철학, 예술 등등의 분야를 넘나들었고, 라스코인들조차 ‘동굴’로 가는 시간을 자신의 삶 속에 부여하고 살았는데 우리는 오직 ‘돈’과 ‘자본’, ‘소비’와 ‘소유’에서만 삶의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신성함’은 우리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에너지라고 합니다. ‘속(俗)의 세계’는 분절적인 질서를 인정하는 것으로, 인위적인 리듬이 부여된 일상은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이 ‘반복됨’을 못 견디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질서를 상기시켜주는 ‘입문의식’ 또는 ‘제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라스코인들에게 동굴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고, 죽음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다시 태어나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존재를 그리고 일상의 질서를 삼키고 무(無)로 만들어 버린 후 ‘재생’의 느낌을 줘야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만나는 사람들도, ‘규문’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인들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업무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존감, 에고, 자의식 등등 스스로를 내세우는 태도를 설명하는 단어는 많아졌는데, 동시에 타자와 더불어 사는 능력은 무력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타자를 규정하고 거기에 감정을 덧붙여서 번뇌에 시달리는 것은 타자와 분리되지 않은 경험들을 배제할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은 공동체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상과는 다른 지평 속에서 질문을 던지고 체험하기를 갈망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일상과 다른 차원의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술’입니다.

 
  1. 필멸의 인간, 불멸의 예술


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인간은 필멸성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언젠가 반드시 무(無)가 된다는 것을 자각하였을 때 인간이 견뎌내는 방식 속에서 예술의 역할 내지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고유의 신화를 전승하는 이유도 결국 나는 사라지겠지만, 삶은 계속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채운 선생님은 책을 읽을 때의 쾌감 중 하나가 오래 전 누군가로부터 이어져있다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프리아모스 왕이 아킬레우스에게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변치 않는 정서가 있고 그 정서로 엮인 사람들과는 아무리 먼 시간과 공간이더라도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저도 경험한 적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기는 남겨져서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읽거나, 전승하거나, 남기거나, 공동체를 이루고, 의례를 반복하는 이유 또한 결국에는 필멸을 자각한 자들이 능동적으로 불멸을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와 닿아있지만 결국 예술은 죽음을 등에 업고 현재라는 시간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부단히 걷는 걸음이 아닐까요.

지난 여름 ‘Thinking Monday’의 강의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김동인의 소설 ‘광염 소나타’ 속 등장인물 같은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붓다의 고행, 세잔의 관찰,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일 매일 글쓰기처럼 무의미한 시간의 반복이야말로 그것을 견뎌낸 인간을 다른 차원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슬라이드로 속 브랑쿠시의 작품 중에는 알처럼 사람 얼굴을 둥글게 표현하여서 원초적 형태성을 보여주는 것도 있었고, 금속의 무거운 재질로 새의 비상과 중력의 공간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무거운 재질에서 비상하는 원천의 힘을 발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무한주>에 19년, <새> 연작에는 28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흙먼지 풍기는 작업실, 허름한 작업복, 현장 인부를 떠올리게 하는 다부진 몸짓으로 돌을 쪼는 그의 행위 속에서 경건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이번 세미나와 강의를 통해 ‘성스럽다’라는 말이 덮어쓰고 있던 흙먼지를 털어내고 내 삶속으로 들어 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체 3

  • 2018-12-11 10:49
    읽고 쓰는 행위로 불멸을 추구하는 행위에서 신성함이 느껴집니다 ㅎㅎ p.s. 회식의 무의미성을 견디세요!ㅋㅋㅋㅋ

  • 2018-12-11 21:20
    회식자리의 한계를 이렇게 후기로 승화시켜 주시다니요ㅎㅎ 지현샘 후기를 읽으니 신성함에 대한 생각이 확장됩니다~
    한계가 두렵고 불편하기 때문에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를 사유하는 태도, 매번 똑같아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를 만들며 반복하는 태도. 이런 행위를 하는 순간, 고대인에게나 있을 법한 그 신성함을 '사소하게 여기는 일상'에서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후기 너무 잘 읽었습니다^^

  • 2018-12-12 19:14
    아... 못가서 아쉬웠는데, 자세한 후기 감사해요~~ 쌤의 후기를 읽노라니 요번 문탁 축제에 와서 특강을 해주신 김기택 시인의 '사무원'이라는 시가 생각나네요...회식 고행...홧팅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