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6주차 (12월 15일) 공지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12-10 14:22
조회
146
공지부터 드릴게요~ 다음 주에는 <상징, 신성, 예술>의 나머지 부분을 다 읽으신 후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A4 1장 분량의 글을 써오시는 것입니다. 간식은 관희샘과 지안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어느덧 시즌1의 마지막 사상가 엘리아데의 세계로 진입했습니다! 두둥- 개인적으로는 이번 시즌에서 제일 어려운 책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신성’이라는 단어에 계속 걸려 넘어지기 때문일까요? 그가 말하는 예술이 알듯 말듯 아리송했더랬습니다.


엘리아데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앞의 세 사상가가 말한 예술의 발생을 먼저 빠르게 훑어보겠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유동하는 마음’이 키워드였죠.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기호로 1:1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응될 수 있는 지시 관계를 벗어나 유동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예술의 기원이라고 말이죠.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인 의례를 ‘위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죽음과 성 같은, 분명 인간의 체험과 맞닿아 있지만 모든 의식적 영역을 넘어가는 체험들. 그것은 분명 일상과는 다른 층위의 경험인데요, 바타유는 주기적인 의례를 통해 이 힘들을 폭발시키는 행위가 예술의 발생의 지점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자답게 ‘언어’의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았습니다. 각 사회마다 특정한 의미 체계 즉 구조가 있는데요, 예술은 그 구조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각 사회마다 예술의 의미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지금 우리가 예술로 의미화 하고 있는 구조대로 다른 사회의 예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죠. 그에 따르면 예술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의미 체계의 구조를 ‘폭발’시킨 다음 재의미화의 과정을 거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이 세 명의 사상가는 어쨌든 우리의 일상적 사회의 코드에 매몰되어서는 예술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늘 ‘이것은 저것이다’라는 공식을 탈피해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 엘리아데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예술을 논하고 있습니다.

엘리아데의 키워드는 ‘신성성’입니다. 종교학자 답게 신화와 종교를 이야기하면서 예술을 논하죠. 신화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인데요, 채운샘은 과학 또한 그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 뜨는 작용을 신화에서 ‘태양의 신이 다섯 손가락을 편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과학에서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설명하는 식이죠. 세계의 운용을 나름의 방식대로 설명하는 것. 그 기능에 있어서는 신화와 과학이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이 절대 그 자체로 진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은 모든 것을 theory, ‘이론’이라고 말하더라구요. 일단 어떤 이론을 세우려면 과학자 자신이 가설을 세워야 하고, 그 가설을 다양한 환경에서 증명하는 과정이 이론 정립의 프로세스인데, 그렇게 세워진 이론 또한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다루는 이론들이 ‘절대 진리’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과학에 대한 저의 환상(절대 불변의 ‘법칙’을 다룰 것이라는)을 깨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잠시 이야기가 새나간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엘리아데는 신화와 종교를 이야기한 학자이고, 신화는 과학과 같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신기합니다. 인간은 왜 태양이 뜨는 원리를 궁금해할까요? 이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떤 유용함이 있을까요? 하루를 살아가는데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 원리를 안다고 해서 그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근원적 일자

이런 의문은 일상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굉장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앞에 놓인 ‘일’이지 태양이 어떻게 지고 뜨는가 하는 ‘당연한 운용’의 원리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예술의 발생 지점은 바로 여기인 것 같습니다. ‘당연한 진실’에 대해 질문하는 것, 그 진실을 만들어내는 근원적 힘을 다루는 것. 일상 생활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예술을 통해 낯설어집니다.

그 근원적 힘을 왜 사유해야 하는가?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일상 속에서 ‘나’라는 객체를 유지하는 모든 활동들은 그 근원적 힘에 비하면 매우 일시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죠. 너와 나는 원래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감각은 분명 일상의 차원은 아닙니다. 진화론은 모든 생명이 ‘양피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DNA에는 ‘나’라는 개별자가 아닌 저 몇십 억 년전에 생명체가 처음 생겨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생명체들의 기억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초파리는 인간과 60프로 일치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생명체는 이전까지의 기억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기억들을 가지고 그 위에 덧씌워져가며 탄생하는 것이죠.

이러한 지점, 즉 객체를 발생하게 하는 근원적 일자에 대한 사유를 과학 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예술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은 객체를 객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사회적 코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코드가 발생하는 근원적 원리 및 기원을 말하고, 눈에 보이는 형상을 드러나게 하는 힘을 다룹니다. 엘리아데가 묘사하는 ‘신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역의 합일’ 개념은 성과 속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음양’ 개념처럼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양은 강하고 음은 강하다, 성은 거룩하고 속은 비천하다는 식으로 따로따로 분리해서 규정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음양의 성질, 성과 속의 속성은 반드시 그와 상반되는 힘과 함께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납니다. 근원적 지평에서는 분화되지 않는 힘들이 작동한는 것이죠.



죽음, 신성성

그러한 근원적 지평을 사유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주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분명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체험이지만 일상을 방해하는 힘처럼 작동합니다. 죽음이 삶 속에 내재되어 있다, 언제든지 나는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기 보다는 멈추게 합니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견고한 코드로 이뤄지는 일상의 유지를 위해 죽음에 대한 사유를 배제하며 그 문제를 병원에 위임하며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죽음 뿐만이 아니라 동물과 같은 ‘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우리는 ‘타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를 이루는 견고한 코드의 세계로는 사유할 수 없는 수많은 ‘타자’들을 우리는 불편해 하면서 지나치거나 거부합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을 복원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타자로부터 분리된 채 살아가는 이 경험들은 우리의 이해의 폭으로 사유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을 쉽사리 규정하고, 증오하게 만들며 그로 인해 번뇌가 쌓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타자에 대한 다른 생각을 끌어들이고, 그것으로 일상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이고 신성함이라고 엘리아데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그래서 불편함을 주는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 신성함은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체험이 아니라, 익숙한 코드를 전부라고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 접속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날 때부터 특별한 채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원리에 대해 질문하고 고행을 지속했습니다. 우리가 특별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신성성은 또한 정신적인 문제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자처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는 신체’를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이전과 그대로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감각하는 이 신체로는 다른 관념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세계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이 신체의 배치 자체를 바꾸어야 세계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죠.



필멸하는 존재, 기억 만들기

채운샘이 말씀해주신 것 중에 아마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필멸에의 공포가 예술의 근원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반드시 소멸한다는 자각이 우리로 하여금 같이 살아가고, 예술 활동을 하게 한다는 것. 우리가 아이를 낳는 이유도 나를 넘어선 종족 보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공동체 형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더하여 ‘기억의 공유’ 또한 보존에의 열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읽고 왜 쓰는 것일까요?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겪을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14세기의 글을 지금 읽으면서 그 시간과 접속하는 경험.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지평을 확장하는 체험. 또한 마찬가지로 쓴다는 것은 보는 사람을 전제합니다. 내가 지금 쓰는 글이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을 통해 살아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라는 객체 하나는 죽을 수 있지만 나의 사유는 남아 누군가에게 다시금 재생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이것은 기독교와 같이 믿음으로써 천국이라는 불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과는 다른 종류입니다. 지금-여기와 다른 이상적 세계에 닿고 싶다는 욕망은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 생성됩니다. 지금 죽어도 나는 반드시 영생의 세계에 다다르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읽고 쓰는 행위는 ‘나’라는 객체는 반드시 죽지만 그 다음을 살아갈 사람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을 아직 오지 않은 후대의 사람들이 읽을 것이라는 믿음. 이것은 객체의 필멸을 긍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행위입니다. 이것이 또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채운샘이 설명해주신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촛불이 꺼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가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카메라. 촛불이야 그냥 그 장소에 가서 키면 될 것이지 왜 굳이 시작점을 정해놓고 거기서부터 꺼뜨리지 않고 가야 하는 것일까요? 일상적 코드의 렌즈로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 행위 자체도 신성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 행위 자체를, 그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는 카메라 또한 신성한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어요. 그 장면을 ‘성공적으로’ 찍어야 하는 재현의 카메라가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하는 카메라. 예술은 신성한 주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성함에 함께 참여하는 ‘행위’라고 느껴졌습니다.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링크 남겨드립니다 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O3Dp6EdFR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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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1 21:05
    오호~ 알찬 후기 잘읽었습니다~!ㅎㅎ저는 지은샘이 언급했듯, 신성함은 특별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코드를 전부라고 여기지 않는 자'들이 겪는 낯선 체험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가는 시점에, 예술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4명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죽음과 고통에 대해 더 알고싶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