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3주차(8.14)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8-10 12:05
조회
111
니체의 고독과 루쉰의 고독, 니체의 심연과 루쉰의 심연, 니체의 미래와 루쉰의 미래, 니체의 쓰기와 루쉰의 쓰기. 니체와 루쉰은 무척 닮았으면서도 또 각자가 독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만 둘을 비교하고 싶어지는데, 이건 단지 제가 둘 말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선은 이번 주에 읽었던 두 서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적인1>의 서문과 <외침>의 서문. 둘은 왠지 비슷한 깊이의 고독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다른 수준 다른 영역에서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두 서문 모두 작가들이 42세 때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은 삼십 대 초반에 쓴 것이고 <외침>은 삼십 대 후반에 쓴 것이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분명히 어떤 공명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허무 혹은 좌절의 자리에서 발을 내딛는 ‘시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니체는 그것을 병적인 회의와 겹겹이 에워싸인 고독으로부터 시도되는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을 향하는 회복기의 여정으로 그립니다. 루쉰에게는 희망과 배반, 그리고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는 철방 같은 절망에서 ‘그 절망 또한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 자가 내지르는 외침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는 있습니다. 둘의 고독은 단순하게는 암울한 시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무책임한 말이죠. 니체를 절망스럽게 한 것은 왜소한 근대 유럽인이지만 그 사유의 기폭제는 질병이었습니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이었던 것이죠. 루쉰의 절망도 한편으로는 이념과 계몽정신으로 뭉친 왜소한 근대인을 향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도 거대하게, 여전히 자신을 나으리라고 부르는 룬투와 룬투가 사는 자신의 고향, 구습으로 가득 찬 중국인의 몽매-오만도 함께 있었습니다. 조물주의 채찍이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다면 털끝 하나도 바꾸지 않을 중국이라는 거대한 짐승 말이죠. 지독한 질병과 거대한 짐승. 이것들이 그들 각각을 보통의 지식인으로 머물 수 없게 했던 심연이 아니었을까요.

또 다른 포인트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둘 모두 고대를 공부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 순서는 다릅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학에서 시작했고 나중에, 병과 고독의 시기에 화학과 생리학 같은 과학을 배웠습니다. 반대로 루쉰은 과학과 의학에서 시작했고 자신의 적막의 시기에 중국의 고대 문헌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이 순서는 그들의 만난 심연의 성격 차이에 의한 것이지 않을까요? 어쨌든 둘의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고대 중국인들의 철학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마지막 포인트는 교량이라는 감각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쓰는 걸까 하고 묻는다면 ‘미래’라고 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희망과 기대로 가득한 미래는 아닙니다. 이곳의 나쁜 것이 다 사라지고 좋은 것만 남아서 꽃길만 걸어갈 그런 미래는 아닙니다. 미래 세대는 우리의 좋음의 표상이 다 투사된 아름답기만 한 무엇은 아닙니다. 니체는 <인간적인>을 자유정신들에게 바친 책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정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도 아니라는 것이죠. 이미 니체는 자신이 데카당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니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그들이 어떤 운명들 속에서 탄생하고 어떤 길로 오는지를 통찰하여 미리 묘사한다면, 아마도 그들이 오는 시간을 앞당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인간적인>, 서문 2절)

조금 더 가라앉아 있기는 하지만 루쉰의 생각도 이와 닮았습니다. “아직도 지난 날 그 적막 어린 슬픔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 터, 그래서 어떤 때는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고함을 내지르게 된다. 적막 속을 질주하는 용사들에게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도록 얼마간 위안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다.”(<외침> 서문)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아직 있을지,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 철방을 부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자유정신이 태어나는 것 역시 미지수입니다. 또 그들에게 새로운 속박과 철방이 없으리란 법도 없구요. 그러나 그건 그들의 몫입니다. 루쉰은 아무것도 안 될 거라는 자신의 확신과 염세주의조차 믿지 않았기에, 회의를 회의할 힘이 있었습니다. 앞은 부연 안개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때 할 수 있는 건 절망도 희망도 없음에도 뭐라도 내지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침>은 말 그대로 그렇게 내지른 함성이지요. 그렇게 응답없는 안개 속에서 계속 소리를 지른다면, 혹 누군가 안개를 질러가려는 자들에게 저기 누가 있음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광인일기>와 <아Q정전>에 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이 소설들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고 말합니다. 저도 예전에 읽었던 때와는 무척 다른 감동으로 읽었는데요. 마음에 와닿은 것들을 남겨보겠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계속 곱씹게 되는 키워드는 ‘섬광 같은 자각의 순간’입니다. 그것은 두려움 또는 부끄러움, 권태나 실패감이나 허무함이기도 한 어떤 충격의 순간입니다. 아Q의 가장 큰 무능이라면 바로 이 순간, 그 견고한 정신승리가 주춤한 순간을 직시하고 붙들지 못하고 ‘이내’ 술과 잠과 빠져버린다는 점에 있습니다. 무척 찔리는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술과 잠보다도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많지요. 치킨(우릴 배신하지 않는)과 초콜릿과 커피, 친절한 친구들과 가족들, 각종 예능과 컨텐츠, 여행이나 심리상담 등등. 조금이라도 탈날까, 저희에게는 위로와 완충장치가 넘치고 넘쳐납니다. 강의를 듣던 중 아Q의 자기정당화와 위안은 어쩌면 무척이나 단순한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Q는 ‘예로부터’, ‘요즘 세상은’, ‘군자는’ 등의 몇 가지 문장을 들먹일 뿐이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을 합리화할 훨씬 더 촘촘하고 강력한 근거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현실이니까, 자본주의니까, 남들 다 하니까. 우리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과 우리가 겪는 사건을 의문스럽고 공포스럽게 겪지 않을 수 있는 섬세한 기술이 아주 잘 마련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렇게 안락하게 살아가면 좋겠지만, 니체의 표현대로 삶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Q는 일명 ‘탈아Q적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도박 빚을 잃었을 때, 성욕과 식욕이라는 자신의 원초적 본능을 감지했을 때, 웨이좡의 울타리가 아닌 혁명에 눈을 떴을 때, 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을 때, 까막눈의 수치심을 느낄 때, 마지막으로 ‘살고 싶다’고 느낄 때. 마지막 순간은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씹어먹는 듯한 ‘늑대의 눈길’ 같은 것을 느낍니다. 만약 아Q가 죽지 않았다면 여기서 어떤 전환이 일어났을까요? 그는 자신의 패배, 자신의 몰락, 자신의 무지를 받아들일까요? 영혼을 뚫을 듯한 ‘눈빛’으로부터 저는, 만일 아Q가 죽지 않았다면 현실을 직면한 그가 <광인일기>의 광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은밀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광인의 광기 혹은 총명함도 자신을 쳐다보는 수상하고 공포스러운 ‘눈빛’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광인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러한 자각의 확대였습니다. 수상함과 의심의 대상은 이웃 사람들에서 형과 어머니로, 그리고 끝내 자기 자신으로 이어집니다. 사자, 토끼, 여우 등으로 비유되는 유럽 열강들이라는 외부 세력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자신의 가족인 중국의 지식인들과 중국의 몽매함입니다. 그리고 광인(루쉰) 자신도 거기서 벗어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결론은 ‘구하자!’라는 당찬 구호나 의기투합한 고발로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겁에 질린 입에서 약하게 터져 나온 물음으로 끝이 납니다. 나만 빼고 식인자라는 순결주의 속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죠. 광인의 자각은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각자도생과 경쟁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그 조건이 쾌적하게(공장식 축산은 가려지고 낙오된 자들은 배제됨) 마련된 지금, 우리는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43쪽)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모르는 채 쌓는 업. 여기서 광인과 같이 예민해진다는 것은 병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지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하는 냉소가 가득합니다. 광인이 마주했을 질문의 불가능성과 적막을 생각하면 누가 미친 것인지 헷갈리게 됩니다. 채운샘은 누가 미친 것인가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단지 다수이고 이전부터 그랬다는 것이 지금 이 현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봐야 무리 도덕입니다.

아Q와 마찬가지로 저희는 좀처럼 몰락하지 않습니다. 몰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루쉰이 진단한 중국인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여전히 자신들이 중심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루쉰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이런 질문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찰나적 자각의 순간에 우리는 질문을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아Q의 탈아Q적 순간, 뭔가가 멈춰 세워지는 순간, 우리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판데믹이라는 몰락 앞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이것을 직시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정신승리하려는 것 아닐까? 아Q의 기술들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자기 경멸의 제일인자’ 기술, 더 약한 자를 패주는 기술, 곧 극복해서 넘어가리라는 기술, 그냥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는 기술 등 말입니다. 또 깨알 같은 논리들을 가져와서, 의학기술과 과학기술을 믿고, 혐오를 불려가면서 이 자각의 기회를 망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씀은 생각 거리를 남깁니다.

뭔가 주절주절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다음 주 공지를 하고 마칠게요.

-<방황>의 ‘술집에서’, ‘고독자’,  '죽음을 슬퍼하며’를 읽고 ‘아Q 같은 지식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뭘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고, 구절과 함께 이야깃거리를 적어옵니다.

-<인간적인1> 3장과 4장(~221쪽)을 읽고 구절과 함께 이야깃거리를 적어옵니다.

-온라인 조는 줌에 접속하셔서 토론해주세요!
전체 1

  • 2021-08-11 03:33
    ‘고독, 심연, 미래, 쓰기’ 이 키워드로 루쉰과 니체가 만났네요. 이 키워드로 정리한 민호샘의 글을 읽으니, 이 둘이 서로 다른 층위 속에서 자신의 문제이자 곧 자신의 시대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풀고자 했는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좀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조금 다르지만 둘 다 청년들을 가르쳤다는 점도 있네요.
    니체 첫 강의에서 니체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알아야 그의 텍스트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는 채운 샘의 말씀이 기억나요. 예를 들면 칸트를 알아야 니체가 칸트를 왜 비판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니체도 모르는데 칸트는 어찌 알아? 라고 속으로 불평을 했죠. 그러고보니 니체만 따로 떼어서 그의 철학 개념을 이해할 방법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번 루쉰 강의에서도 루쉰이 겪은 중국의 역사 배경을 알아야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특히 [아Q정전]은 그 시대를 ‘알아야 읽힌다!’라고 강조하셨죠.
    민호샘에게 남은 질문이 제게도 이어지는데요. 니체와 루쉰이 민족, 진보, 물질적 풍요와 같은 근대적 가치의 우상화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자신의 시대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고민한 것처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재의 우리 시대를 직면하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강의 중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의 ‘여기가 우리 출발점이야!’, 이 대사를 듣고 매우 뭉클한 감정이~~~ 나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직시할 것인가?’ 또 ‘뭘 겪어도 살아야 하는 것이 도덕을 넘어서는 것! ’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