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6주차 후기

작성자
경희
작성일
2021-09-08 21:51
조회
109
중과부적 (衆寡不敵), 낙운관이라는 사립 중학교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는 구샤미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이 일컫는 말이다. 구샤미의 집과 학교 사이에 있는 공터에서 어슬렁거리던 학생들이 구샤미의 객실 앞까지 들이닥친다. 구샤미는 결국 교장에게 단속을 청하고, 교장은 구샤미의 집에 대나무 울타리를 둘러쳐 준다. 구샤미는 일단락이 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담 이쪽저쪽에서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온 공을 찾겠다며 담장을 넘어 들어오기 일쑤다. 나는 처음에 학생들의 행동을 그 나이의 발랄함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학생들을 사주한 이가 있었다. 사업가 가네다. 돈에 고개 숙이지 않는 구샤미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의 작품이었다. 학교, 학생들의 숫자와 그들의 혈기에, 가네다의 부와 명예, 권력 앞에 홀로 놓여있는 구샤미. 식솔이 줄줄이 달린 가난뱅이에 일개 중학교 교사인 구사미의 처지를 일러 주변 사람들은 중과부적이라고 한다. 중과부적은 많은 수에 밀려 대적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돈과 다수에게 타협하지 않는 구샤미의 모습은 결코 용맹스럽단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아슬아슬한데다 이래서 어쩌겠다는 건지, 조바심까지 난다.

협잡꾼과 모리배들이 집 주변에 진을 치고 있고, 그들이 이웃인 것을 알지 못했다면 구샤미는 차라리 나았을까.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돈과 사업가를 흠모하지 않는 구샤미는 다수의 먹잇감이 되기 쉽상이다. 역시 그들은 1미터 남짓 대나무 담장 안에서 굴처럼 지내는 구샤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담을 넘나들며 구샤미의 생활을 조롱하고 위협한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는 이들은 이웃이거나, 학생들이다. 학생들마저,  미래가 암담해지는 순간이다. 사방이 천지분간이 안 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혼자 용을 쓰느니 차라리 대세를 따르겠단 생각도 해봤음직 하다. 구샤미에게 세 가지 길이 제시된다. 돈과 다수를 따르는 것, 최면술로 신경의 안정을 도모하며 현실을 기만하는 것, 그리고 소극적인 것의 수양. 구샤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궁금했다. 그리고 소극적인 것의 수양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말한 일본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의해 우리의 개화가 부득이하게 변화를 강요당하기 때문에 오로지 피상에 편승해나가고, 또한 편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버티기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린다고 하면 아무래도 일본인은 불쌍하다고 할까, 가련하다고 할까, 정말로 언어도단의 궁핍한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내 결론은 그것에 불과합니다.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해야 한다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실은 곤란하다고 탄식할 뿐, 극히 비관적인 결론입니다. 진실이라는 명제는 모르고 있을 때에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난 뒤부터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절박한 고비를 돌파할 것인가?” 하고 질문을 받아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나에게는 명안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가능하면 신경 쇠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내발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좋으리라정도로 형식적인 말을 할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나의 개인주의』, 《아사히 강연집》)

  소셰키는 청중들을 향해 물밀듯이 덮쳐온 개화의 현실과 일본인들의 심적 어려움과 관련해서 서로를 불편하게 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낙관적이지도 않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실은 곤란하다고 탄식할 뿐, 극히 비관적’이라는 정말 비관적인 말로, 개화를 맞이하고 있는 일본의 처지를 마무리한다. 개화는 일본인 각자에게 구샤미가 처한 중과부적의 상황이랄 수 있다. 나는 소세키의 강연 글에서 소세키는 자신이 살고 있는 개화라는 현실의 면면을 놓치지 않는 기민함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소세키는 이야기 말미에 모파상의 소설에 나오는 ‘내연의 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실 또는 진심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3,4층 높이의 창에서 뛰어내리는 내연의 처와 같은 잔혹한 선택을 해서도 안 된다고. 우리를 덮쳐오는 ‘궁핍한’ 상태에 “가능하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내발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좋으리라”라는 삶의 기예를 제안한다. 휩쓸리지 않고 파멸하지도 않으면서 단절이 아닌 삶. ‘갑의 흐름이 을의 흐름을 낳고 을의 흐름이 병의 흐름을 짜’ 낼 수 있는 정도의 삶의 밀도와 속도를 유지하는 것. 구샤미에게 누군가 제안한 소극적인 것의 수양이 소세키의 이 제안과 맥이 닿는 것인가? 아, 어렵다!

 
전체 2

  • 2021-09-09 11:03
    "휩쓸리지 않고 파멸하지도 않으면서 단절이 아닌 삶. ‘갑의 흐름이 을의 흐름을 낳고 을의 흐름이 병의 흐름을 짜’ 낼 수 있는 정도의 삶의 밀도와 속도를 유지하는 것."
    중과부적의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배우는 니체, 루쉰, 소세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인 것 같아요. 독일, 중국, 일본이라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척이나 섬세하고 예리한 눈을 가졌던 그들은 낙관에 빠지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상황을 비관했지만, 그 현실을 살아낸 그들의 태도는 '우리는 다만 걷자'는 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 막막함을 그 어떤 신념도 믿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얼마 만큼의 회의와 머뭇거림과 물러남이 필요했을지 곰곰 생각해봅니다. 숙고와 배움은 말할 것도 없구요. 소세키로부터 이 문제를 주목하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1-09-10 11:36
    니체는 두통을,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ᆢ우리시대는 우울증을 ᆢ아픈 사람으로 넘쳐나는 이 사태를 살아가는 태도는 어떠해야할까요? 육안은 차라리 감고 온몸이 눈이 되어 더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ᆢ샘의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