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7주차(9.11)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9-07 13:21
조회
103
훌쩍 가을이 왔습니다. 3학기도 어느새 반이 넘게 지났으니 눈 깜빡하면 연말이 오겠군요! 정신없이 읽고 쓰면서 이렇게 한 해를 보내게 되네요. 벌써 빨간 책만 다섯 권째, 저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2>(1878)는 그 구상 시기는 같더라도 완결의 시점에서 <인간적인1>(1876)과는 2년의 격차가 있는데요. 뭐랄까, 조금 더 공격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전작에서는 예술, 철학, 종교에서의 생성적인 측면(양의성)이 강조되었다면, 여기서는 더 본격적인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느낌적인 느낌이긴 하지만요. 바그너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버린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요, 특히 이번에 읽은 예술 부분에서는 잡다하고 화려하고 과도한 것을 규탄하며 절도와 간결함과 담백함을 강조합니다.

“예술에서의 지나친 양식은, 소재와 의도가 지나치게 장식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것을 조직화하는 힘이 약해진 결과이다.”(117절)

“예술의 잡종은, 그러한 잡종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느꼈던 불신감을 입증한다.”(139절)

사실 절도 있는 양식에 대한 요구는 예술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도취에 반대합니다. 종교든 학문이든 섭생이든, 니체는 고조시키고 정서적 들뜸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모호함에 대단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구는 모든 것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봅니다. 니체는, 자신이 ‘관찰한다’고 말합니다. “관찰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비밀에 찬 적대 관계, 즉 서로 마주 바라보는 적대 관계”(11쪽)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니체는 인간을 관찰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어떤 인간적 표상 속에 가두고 있는지, 우리가 아는 ‘인간적인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하나하나 까발립니다. 철학, 종교, 믿음, 국가, 민족, 가족, 남성과 여성, 사랑, 동정, 건강에 대한 믿음들 하나하나가 두들겨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니체는 근대의 인간 신화 바깥에서 무기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외부를 필요로 합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와 인도의 사유(쇼펜하우어를 경유한), 그리고 인간성 바깥의 것들인 생리학과 화학과 물리학의 개념들을 끌고 와, 질기고 단단한 인간성의 표상들을 무두질하고 구멍을 냅니다. 그의 표현으로 “바늘로 확실하게 찔러보는 것”이죠. 니체는 이에 대구가 맞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만족이라는 '금으로 된 양 모피'는 매질은 막아내지만, 바늘로 찌르는 것은 막지 못한다."(<인간적인1>, 569절)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매질'이 아니라 심리를 꿰뚫어 아프게 찌르는 바늘만이 우리의 두터운 허영심과 정신승리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진리탐구자의 진지하고 고양된 흥분 속에서가 “심리학자의 명쾌하고 호기심에 차 있는 듯한 약간의 냉담함” 속에서 이뤄지는 작업입니다.



저희는 ‘예술 작품에 대한 취향의 원천’이라는 제목의 83절을 놓고 몇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체는 예술 감각의 기원에는 다른 사람이 생각이나 암시를 알아맞히는 기쁨이 있고, 좀더 세련된 기쁨은 점, 선, 면 같이 규칙적이고 균형적인 것을 발견할 때 일어나는 만족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질서에 대한 이러한 “기쁨에 어떤 싫증을 느끼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균형적인 것과 규칙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에도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는, 좀더 섬세한 감정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두고 우리는 니체가 질서나 조화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 길게 이야기해보았습니다. 가치를 전도하라고 말하는 그는 단지 파괴와 극복만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위 텍스트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전도는 파괴든 그에 선행하는 것은 우선 어떤 절도와 규율을 만들고 거기에 숙달되는 일입니다. 그 낯선 일에 손발이 익숙해지고 그 낯선 사유가 몸과 머리에 충분히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그 단기적 습관을 떠나는 일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전과 다른 리듬을 만들고 그러기 위해서 한 국면 한 국면을 다듬는 일이지, 대뜸 새로운 걸 해보겠다고 제멋대로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공부하는 저 자신에게 거듭 새겨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는 고양이의 눈이 관찰해내는 인간의 모순과 허풍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주에 저희는 고양이라는 장치 설정이 정말 탁월하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저는 괜히 혼자서 고양이의 상징성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녀석은 몇 번이나 내던져져도 끈질기게 주인의 집으로 기어들어가며, 주인이 잘 때 그 등 위에 올라타고, 아이들의 잠자리 속으로 파고듭니다. 소리도 없이 사뿐한 발걸음으로요. 이런 고양이의 모습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기 자신과 친구들의 허세와 치부를 드러내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집요한 자기 관찰의 시도를 동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소세키는 니체의 냉담함과는 또 다른 태연함으로 인간적인 것들을 관찰합니다. “나는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는데, 그럴수록 그들이 제멋대로 군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21쪽)

가령 인간은 각양각색의 옷을 지어 입고 머리도 수십 가지로 바꿀 정도로 한가한 주제에 만나기만 하면 바쁘다고 지랄들이라는 대목이나, 운동에 대한 평판이 그렇듯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변하고 휙휙 뒤집어진다는 대목, 인스피레이션에만 의존해서 쓴 시를 발표하는 도후 군과 그에 대해 선생들이 왈가왈부하는 대목 등은 우스우면서도 콕콕 찔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안 드는 것은 일단 철거하고, 개량하고, 철거하는 식으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서양인의 적극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는데요. 3교시에 읽은 소세키의 연설 <현대 일본의 개화>와도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명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을 보내는 사람이 만든 문명인 셈이지.”(416쪽)라는 도쿠센(다음 주 범위에 등장) 선생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듯합니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런 선가적 태도도 믿지 않습니다. 곧 태평함과 마음 수련만을 강조하는 도쿠센의 허풍과 정신승리도 소개되니까요.

저희는 이렇게 니체와 소세키의 눈을 빌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을 더듬어 관찰해가고 있습니다. 비록 적지 않은 분량이 몰아치고 있지만, 우선 소화되는 만큼 가져가고 나머지는 잘 담아두었다가 언제라도 다시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 관찰에 대해 주절거리다보니 니체가 '자기관찰'이라고 이름 붙인 아포리즘 하나가 떠오르네요. 그걸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는 자기 스스로의 탐색과 포위공격에서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지킨다. 또한 그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있는 보루 외에 자신에 관해서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에게 본래의 요새는, 예를 들어 친구들과 적들이 배신자가 되어 그 자신을 감추어진 길로 이끌어가지 않는 한, 다가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곳이다."(<인간적인1>, 491절)

공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1장 끝(~214쪽)까지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것들을 준비해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끝까지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것들을 준비해옵니다.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최종 수정본을 금요일까지 채운샘 메일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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