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2학기 7주차 후기

작성자
정희
작성일
2021-06-15 13:57
조회
89
마키아벨리의 통치방법 ( 알튀세르의 정치철학강의 중에서)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고전을 읽을 때 조심해야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이 부분을 늘 염두에 두고 텍스트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각 시대마다 자기 한계를 갖고 있고 저자 또한 그러한 한계를 속에 있으므로 현재적 시점으로 그를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가 동시대인들과 달리 어떤 지점에서 그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군주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라는 동시대인들의 담론과 달리 ‘도덕적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라는 현실적 자각과 함께 역동적인 힘의 관계로 정치를 파악한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가 정치를 역동적인 힘의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은 선험적 주체를 상정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체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 속에서 구성된다. 따라서 정치를 사유한다는 것은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주체를 생산해내는지, 조건과 조건이 만나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지 본다는 것이고 여기서 어떤 주체가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문제의식은 없다. 이것이 발리바르가 말한 ‘주체를 구성적 관점에서 사고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해주셨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2~14장에 걸쳐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국군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국가의 토대를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법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좋은 군대이다. 여기서 군대는 단순한 병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인 힘이라고 알튀세르는 봤다. 군대라는 정치적 힘을 갖고 있어야 국가의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좋은 법은 좋은 군대 안에 맹아로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 이와 상통한다.

또한 귀족은 지배하려고 하고 인민은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의 상이한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지략이 군주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다. 군대는 단순히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치, 정치의 문제와 연결된 것이다.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이다.” 푸코가 말한 “전쟁 상태는 항상적이다.”라는 말의 뜻은 정치를 사법적 모델로 생각하면 안 되고 상이한 세력들이 계속 변동되고 있는 차원이며 우발적인 사건으로 출렁이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뜻이다.

이어 알튀세르가 고등사관학교에서 강의한 강의록 안에 ‘마키아벨리의 통치방법’을 중심으로 마키아벨리를 독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밸리의 통치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폭력이론, 외양이론, 민중과의 관계이론이 그것이다. (강의내용 요약함)

1.폭력이론

ⓐ 목적은 그것이 좋은 목적일 경우에만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즘 하면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도 동원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로마사논고’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단죄되어야 하는 것은 복원하는 폭력이 아니라 파괴하는 폭력이다.”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폭력이 한쪽에 있고 정립적이고 구성적인 폭력이 또 한쪽을 차지한다. 여기서 폭력은 그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어떤 조건적인 상황에 따라 정당화될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요약하면 정치적인 좋은 목적은 모든 종류의 수단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것이 상황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되기 때문에 폭력을 옹호한다거나 비도덕적인 것을 용인한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

ⓑ 냉철한 폭력, 냉소주의에 대한 기술에는 잔인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들도 포함되어 있다. “싸움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법이고 다른 하나는 힘이다.” 하나가 인간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가 짐승의 방법이다.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어떤 조건이냐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요구한 덕목이 유연성이고, 유연성이 바로 지혜이다. 여우같은 지혜가 없으면 사자의 힘만 가지고는 망한다. 그러면서 고대 훌륭한 통치자들이 왜 반인반수로 표현되는지에 대해 정치적 본질과 연결된 것이 아닌지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 부분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 정치는 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대부분의 경우 무력으로 떠밀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무력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순수한 무력의 부질없음.” 여우와 사자에서 마키아벨리가 방점을 찍는 것은 여우이다. 여우의 지성으로 무력의 사용을 지배하기. 그리고 그 무력을 목적에 합치시키기.

그런데 불가피한 무력의 사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은데 동양에서 비폭력주의자 간디나 반전주의자 묵자, 그리고 장자, 노자, 불교 등이 있다. 그들은 무력을 전면적으로 철회한다. 티벳의 경우에도 달라이라마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했던 것은 합리적 근대 정치론을 넘어간 것 같다. 들뢰즈의 ‘외부성’. ‘복원하는 폭력과 파괴하는 폭력’이라는 구도의 완전한 바깥에 비폭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근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패러다임이다. 비폭력주의가 비현실적이다 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확 넘어가는 지점이라고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2. 외양이론

수단과 목적은 인간적 총체, 곧 외양의 총체 속에서 작용하므로 현실적으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군주의 활동은 사람들의 여론에 의해, 민심에 기반하고 있다. 민심은 도덕적 선, 윤리적 정치적 자질에 좌우된다. 사람들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겉으로 내세울 때는 비도덕적인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사람들의 외양에 충돌하지 말아야한다. 민심을 무시한 채로 정치를 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으로 판단하지 손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매우 스피노자적인 상상범주’ 라고 알튀세르는 노트에 적어놓았다.

“정치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두 가지 지반에서 행위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들 및 현실적인 의도들, 현실적은 목적과 수단들의 지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이 그 속에서 움직이는 상상적이고 윤리.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의 기반이다. 정치가는 이런 외양의 본질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파괴하지 않는 가운데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이다.”

정치와 본질사이의 유기적 내적 관계 그리고 동시에 이런 자생적 의식을 개혁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론화되지 않는 의식. 이렇게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들을 어떤 계몽적 주체가 일방적으로 의식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고양시켜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주의 혁명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가? 정서. 정서로 인해 만들어지는 상상, 욕망 이런 것들을 사회주의는 놓쳤던 것이다. 이것들을 계속 의식화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패인이고 정확히 스피노자의 경우에 볼 수 있는 지성교정기획의 부재이다. 공동체적 삶이라는 기반 위에는 우리가 갖게 되는 정서모방이라는 것을 비롯한 온갖 상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들로부터 어떻게 지성을 교정해나갈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런데 그 지반을 생각하지 않은 채 의식화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순진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봐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3.군주와 민중의 관계 이론

군주와 민중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사랑과 미움사이의 정확한 중간은 어디일까.

정서라는 것이 이렇게 양가적이고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정치라는 영역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내용이 군주론에 나와 있다. 군주에게 어떻게 처신하라는 외양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기반에는 이 민중이 있고, 민중들의 변덕스런 정서가 있다고 봤다. 그것을 어떻게 군주가 파악할 것인가. 그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지략인 것이다. 미움도 경멸도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 이런 것이 있기는 있다. 우리가 보통 누구를 두려워할 때 미움을 내포하면서 두려워한다. 이렇듯 상상과 정념을 활용하는 것이 정치의 문제라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이미 정치는 이런 것들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 없이 정치를 환상의 틀 속에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독법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에 대해서 쓰고 있는 그때에 기존의 정치체계인 군주정에 대해 쓰면서도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은 것으로 본다. 마키아밸리가 군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민주정, 공화정이라고 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영감으로 풍부했다고,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밸리를 독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가 무엇을 말할 듯 말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의 절대적 출발은 그 대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마키아벨리가 본 것인데 그것에 대해 논의한 것은 아니고 아직 판타지인 것. 정말 현실적인 감각으로 포착한 것이다. 그래서 고전 정치학을 넘어가는 지점이 바로 이지점이다. 마키아벨리가 멈춘 지점에서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그 대중의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려고 했다. 신학정치론에서 여전히 대중에 대해 모호한 것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에서부터 시작된 스피노자의 대중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 마키아벨리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된다.

“마키아벨리에게 문제적인 것은 일어남이다. 그가 부정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어렴풋하게 마키아벨리가 느낀, 일어날 것을 그가 부정 속에서 사유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사유한 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면서 마키아벨리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후기

늘 요약이 어렵다.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하지만 모든 말이 다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을 아직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시간과 함께 일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이 강의에서 나에게 다가온 것은 ‘외부성’이었다. P와 ~P의 구도가 아닌 완전히 다른 Q를 사유하는 것이, 비록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고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추동한다는 것. 새로운 시각의 유입이 기존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새로운 것에 열려있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쨌든 “내가 내가 아니다. 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야 나를 고집하며 살면서도 반성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냥 나일뿐이다.” 라는 샘의 말씀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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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6 09:24
    철학적이든 정치적이든 '타자'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두 영역이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됩니다!(물론 느낌적으로요!) 어떤 텍스트를 읽고 그것의 외부성을 포착해내는 시선을 갖춰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할 수 있을 텐데, 여전히 그런 시야가 협소하다는 걸 느낍니다. ㅎㅎ;; 그건 정희쌤 말씀하신 대로 시간을 들이는 것밖에 없는 것 같고요. 그래도 혼자 겪는 어려움은 아니니 다행이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