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아홉 번재 시간(7.1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7-08 21:49
조회
104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 자신이 진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바로 이 점이 데카르트의 문제와 파레시아스트의 태도 간의 차이입니다. 데카르트는 명증성에 도달하기 전에는 자신이 인식하는 바가 진실이라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레시아의 경우, 도덕적 자질과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겹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진실에 접근할 경우, 그것은 그가 일정한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어떤 사람이 이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진실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동녘, 116쪽)

《담론과 진실》의 서문을 쓴 프레데릭 그로는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주체가 진실과 맺는 윤리적 관계’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푸코는 (물론) ‘진실이란 무엇인가?’라거나 ‘인식하는 자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주체로 하여금 타자 앞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기 위해 한 문화가 조직하고 발명하는 ‘의무’의 유형, 혹은 주체가 자발적으로 진실을 말하게끔 하는 ‘의무’의 유형”(13쪽)이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수강생들처럼)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파레시아스트는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때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타인들은 그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 자신은 어떻게 자신의 진실을 확신하는가? 객관적 팩트와 합치하지 않아도 주체가 자신이 믿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이때 ‘진실’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솔직함’, ‘진심’ 같은 것과 같은가, 다른가?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파레시아에서의 ‘진실’이란 데카르트적 ‘명증성’과 전혀 다른 지평 속에서 작동하는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파레시아에서 ‘진실’을 확증해주는 것은 어떤 객관성, 명증성 같은 차원의 영역들이 아닙니다. 푸코가 단호하게 말하는 것처럼, 주체로 하여금 진실을 확보하도록 해주는 것은 그의 도덕적 자질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럼 그가 도덕적이라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당황스럽겠지만, 그것은 그가 진실에 접근한다는 사실입니다. 주체는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는 한에서 진실에 접근하며, 그가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은 곧 그가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엥? 말장난 같다고요? 그건 우리가 인식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순간’ 이후의 인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체의 실존과 무관한 객관적 진실이 따로 있고, 누구든 적절한 자격을 갖추고 적절한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진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진실은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주체의 실천 속에 현존하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존을 방치하는 자, 비겁하고 나약한 자, 되는 대로 살고 하라는 대로 하는 자가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실’ 같은 것은 없습니다. ‘공리’ 같은 개념이야말로 고대인들에게 더 없이 낯선 것이겠죠. 고대인들에게 ‘진실’은 ‘진실한 자’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니체가 떠오릅니다. 푸코는 “진실을 말하는 자의 문제는 니체의 문제”(129쪽)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데카르트의 ‘명증성’을 넘어갑니다. ‘누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말이죠.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가 진리를 말하는가?’ 혹은 ‘누구의 진리인가?’라고 물음으로써 니체는 객관적이고 명증한 진리, 즉 참된 것의 추구에 깃든 반응적 힘의지를 폭로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그가 고정불변하는 진리를 의지하는 한에서, 생성변화하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긍정합니다. 그래서 니체적 의미의 철학자, 자유정신은 일종의 파레시아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철학자는 자신의 실존을 시험와 실험으로 내모는 과정 속에서 주어진 삶의 방식을 재생산하도록 하는 인식의 전제들, 환상들, 사유의 저속함들과 싸우는 비판가-계보학자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기를 시도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입법하는 것. 이것이 니체적 의미의 철학자가 진실한 자이자 삶을 긍정하는 자가 되는 방식입니다.

파레시아스트는 니체의 철학자와 닮았습니다. 진실이 객관성과 명증성을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말이나 해도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과의, 타인과의, 기존 권력과의 ‘분쟁적 상황’에 위치시키는 파레시아스트의 부단한 실천입니다. 파레시아는 본질적으로 비판적 기능을 갖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의 실천으로서의 파레시아가 동시에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실천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비판자로서 파레시아스트는 공리에 입각해서 국가나 사회를 감시하는 고발자도,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면서 제 3자의 정의에 호소하는 약자도 아닙니다. 그는 파레시아를 행함으로써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또한 시험에 처하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파레시아는 자기 배려를 매개하게 되는 것이죠. ‘파레시아’라는 교차점 속에서 비판은 그 자체로 자기 실천이 되고 자기 배려는 그 자체로 (단지 ‘잘 살기’가 아니라) 의존함이 없고 환원불가능한, 따라서 위험한 실존을 구성하는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실천이 됩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담론과 진실》 을 260쪽까지(2, 3, 4강) 읽고 함께 이야기나눌 문제나 질문이 담긴 메모를 해옵니다. 간식은 저와 훈샘이 맡았습니다~
전체 1

  • 2020-07-12 13:08
    진실을 말하는 자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사실 니체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저희조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파레시아스트를 '스스로를 자기 자신과의, 타인과의, 기존 권력과의 '분쟁적 상황'에 위치시키는' 자라고 설명한 것이 매우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범위에서 캘리포니아 학생들의 질문이 너무 이해가 갔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자의 진실은 누가 보증해주는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진실은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주체의 실천 속에 현존하는 무엇이었습니다."라는 말이 그 궁금증을 좀 해소해주는 것 같습니다. 진실은 실존을 방치하는 자나 자기 자신을 내버려두고 기만하는 자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진실은 진실한 자의 것이라는 자못 동어반복적 표현이 성립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