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여덟번째 시간(07.07)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7-06 14:43
조회
88
공지가 너무너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ㅜㅜ). 다음 주 공지부터 가겠습니다. 우선 《담론과 진실》(동녘)을 134쪽까지(‘파레시아’ 챕터와 ‘첫 번째 강의’)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란샘과 보은샘께서 맡아주셨어요!

“‘나는 나’. 세상 그 어떤 지배 권력도 이보다 더 확실한 슬로건을 내건 적이 없었다. 항구적인 半파탄 상태, 만성적 괴멸 상태에 처한 ‘자아’를 지탱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비장의 요령이다. 나약하고 의기소침하며 자기바판적인 ‘자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규범의 지속적인 전복과 일반화된 가변성, 테크놀로지의 가속화된 낙후 현상과 신개발에 근거한 생산 활동이 필요로 하는, 지극히 융통성 있는 존재다. 더없이 탐욕스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생산적인 ‘자아’이며, 지극히 사소한 계획에 자신을 열정적으로 쏟아 부었다가 조금 지나면 원초적 유충 상태로 얼마든지 돌아갈 위인인 것이다.”(보이지 않는 위원회, 《반란의 조짐》)

“서구 문명의 종말이라는 임상진단이 내려지고 여러 사건들이 거기에 나란히 서명한 것은 한 세기쯤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그것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는 방식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특히 지금 여기 있으며 오래전부터 있었던 파국으로부터, 우리 자신인 파국, 서구 자체인 파국으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방식이다. 이 파국은 우선 실존적이고 정서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그 파국은 세계에 대한 서구인의 놀라운 이방성(異邦性), 예컨대 서구인에게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사람들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만 지배하려고 애쓴다―이방성에 있다. 서구인이 공연히 자신과 세계 사이에 그렇게 많은 스크린을 설치한 것이 아니다. 실존하는 것에서 자신을 삭제함으로써 서구인은 세계를―자신의 노동을 통해, 암적인 행동주의를 통해, 히스테릭한 흥분을 통해 끊임없이 갈아엎어야 하는―이 황량한 연장(延長)으로, 적막하고 적대적이고 기계적이고 부조리한 무(無)로 만들었다.”(보이지 않는 위원회, 《코뮨이 돌아온다》)

긴 인용문 두 개를 가져와봤습니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각기 다른 두 권의 책에서, 인간의 왜소하고도 비대한 자아야말로 자본주의적 통치성의 가장 중요한 상관물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나’라고 말하는 자아, ‘이해관계’라는 분할 불가능한 원자를 지닌 채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방인으로서의 자아. 이것은 동시에 통치의 최소단위가 됩니다. 자신에게 낯선 세계 앞에 내몰린 개인-자아는 우주 전체 안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삶의 비전을 구성해내는 대신에, 매번 자신에게 닥쳐오는 경제적이거나 신체적이거나 실존적인 온갖 위기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상품과 서비스에 의존하고 전문가들의 명령에 복종하게 됩니다. 외로움은 스마트폰으로, 권태로움은 여행상품의 소비로, 질병은 의료권력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 온갖 불안과 위험은 보험과 미래설계로 ‘해결’합니다. ‘나는 나’라는 슬로건을 내면화한 자만큼이나 길들이기 쉬운 존재는 없습니다.

저는 이들의 문제의식이 푸코와 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푸코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문제 삼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 내면, 영혼 같은 것들이 어딘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견지합니다. 그러나 푸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구성물입니다. 주체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방식, 그 메커니즘은 주체가 타자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규정됩니다. 그리고 근대를 거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는 ‘내면’이라는 어떤 불순물 같은 것이 자리하게 됩니다. 주체는 더 이상 자연과의 관계나 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견해 같은 것들을 ‘나의 것’으로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자기 내면을 실체화합니다.

그 극단에는 신자유주의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신의 재능과 시간과 유전적 특성과 건강과 성격 등등 자기 자신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할 수 있으며 적절한 경영을 통해 끊임없이 증식시켜야 할 ‘자본’으로 간주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열심히 경영해서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안정 등등을 획득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죠. 그렇게 탐욕스럽고도 위태로운 자아는 더 많은 대상들을 소유함으로써 온갖 문제들을 우회하고 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이상적인 삶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자아는 누구보다 생산적으로, 목표 지향적으로 열심히 일하다가도 뜻밖의 사건 앞에서 어떤 통찰도 길어내지 못한 채 무너지며 원초적인 유충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다른 방식은 없을까요? 우리가 무려 7주에 걸쳐 함께 읽은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고대로 돌아가 ‘다른 길’을 모색했죠. 놀랍게도 고대인들은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나’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최상의 관계를 맺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나’는 내면도 이해관계도 아닙니다. 그 자신을 구성하는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번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실체로서의 ‘나’는 실천과 사유의 출발점에도 목적지에도 놓이지 않습니다. 매번 자신을 실현해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자기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을 구성하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함과 더불어 ‘나’를 더 적극적으로, 전면적으로, 완전하게 실현해가는 것입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환원불가능한 나의 실존을 구성해가기 위한 자기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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