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1. 어쩌다 한문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5-11-19 15:47
조회
1018
*<한문 앓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수영입니다. 아시다시피 한문 왕초보인데요.
왕초보를 좀 벗어나길 바라서인지, 한문과 찐하게 앓이를 좀 하라는 마음에서인지, 요래조래 울 홈피에 좀 다른 문자(?)를 섞고 싶으셨는지.
채운샘의 권유 덕에 <한문앓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주1회, 한문을 둘러싼 & 한문을 배우는 일을 둘러싼 온갖 이야기거리를 실어볼까 합니다. 제보 환영, 딴지 환영!
심심한 대로, 재미난 대로, 종종 들러 읽어주셔요. ^^ 1화는 '어쩌다 한문'. 왠지 생각나는 옛날 일입니다.

 

 어쩌다 한문


중 1 때인가는 내 인생에서 (학교) 공부를 제일 잘했던 시기다. 모든 과목에 열을 올렸고, 성적도 꽤나 좋았다. 그 와중에 한문만은 당당하게(!) 40점 대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한문 시험지를 받아들고, 속으로 “거봐, 이래서 조기교육은 안된다니깐!”하며 실실(?) 거렸던 기억까지.

그렇다. 나는 어려서 한문을 배운 적이 있다. ‘조기교육’이라기에는 뭣하지만, 아무튼. 방학마다 나는 외가나 친척집에 보내졌다. 싫을 이유는 없었다. 특히 외가는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시골. 먹거리도 가축도(-,-) 풍성했고, 이 집 저 집, 이 산 저산으로 ‘여기 말고 다른 무언가’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동네 언니들을 따라 온갖 놀이를 했고, 아무개네 집에 모여 ‘축구왕 슛돌이’를 보다가 축구왕 슛돌이를 따라 그리다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동네에도 나의 적(敵)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외할아버지다. 지금도 자주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향교에 가곤 하시는 울 할아버지는 농사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선비체질이다. 지금도 외할머니에 비해 농사능력에서 많이 뒤쳐진다는 소문이.;; <논어> 등을 읽고, 시조를 짓기도 하는 외할아버지는 큰 손녀 딸을 당연히(!) 가만두지 않으셨다. 무려 <사자소학(四字小學)>을 가르쳤던 것이다.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군가 손으로 써서 만든 듯한 흰 색 <사자소학> 책을 들고 “부생아신(父生我身) 하시고, 모국오신(母鞠吾身) 하시네”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소리를 냈다. 한 발짝만 나가면 신나는 것들이 지천인데, 고 작은 방에서 재미도 없고 또 재미도 없는 한문 따위를 읽어야 한다는 것은 내게 정말 불행한 일로 다가왔었다. 매번 '한문 같은 것은 정말 안된다'고 생각했고, '이건(한문 공부는) 정말 불행한 일'이라며 슬퍼했다.

진짜인지도 헷갈리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요강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다. 요강을 안주면 어떻게 하나. 밤 중에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화장실은 당연히 어두컴컴하고 생물체도 많은 푸세식. 게다가 바로 앞에 있는 외양간을 지나야만 하는데, 그곳에는 어린아해에게는 더 추근거리는듯한 어미 소가 있어 자주 무심하게 질척한 콧등을 쑥 내밀곤 했다. 하여 서럽게 또 “부생아신 하시고...” 또, 역시 과장된 기억인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내게 다소곳하게 앉아 사과를 깎게 했다. 그것도 껍질이 3초 만에 마르도록 얇게! 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와 한문을 생각하며, 고추 말리는 방구석에서 매운내를 참으며 꺼이꺼이했던 기억도 있다. 여하튼 동네에서 놀던 것이 재밌었던 만큼이나 할아버지와 한문을 배우는 일은 정말로 싫었다. 이 마음은 오랫동안 변치 않아 나중에 “X선생 영어”같은 것을 배울 때도 한문만은 배우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이를 실천하여 말했다시피 한문은 40점 정도를 맞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말도 안되는 복수랄까.(^^;)

한문 따위 배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어쩌다보니 한문을 배우고 있다. 월요일마다 삼경(三經)스쿨에서 우응순샘의 가르침 하에 동학들과 천자문을 읽는다. 토요일에는 주역을 배우고, 또 연구실에서 여러 샘들과, 여러 책들을 읽으며 한자 언저리를 더듬는 일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한문을 배우고, 또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이게 아직도 내게 어색하다. 그런 것은 ‘내가 아닌 것’ 같달까. 나만큼이나, 친구들에게도 이는 어색한가 보다. 지금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상황들 속에서 한문을 배우고 있다. 이전에 한문이 내게 ‘고난’의 문자였다면, 이번에 한문은 내게 무엇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한문과 더불어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들, 표정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건 분명한 것 같다.
전체 8

  • 2015-11-19 16:35
    할아버지께 이 기쁜 소식을 꼭! 전하거라~ ^^

  • 2015-11-21 00:51
    ㅋㅋ언니 한문 교육 제대로 받았었구먼. 무슨 영화보는 거 같으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한문 읊는 소리 또 그게 싫은 꼬맹이 ㅎㅎㅎㅎ 그나저나 요즘 한문을 일케 열심히 공부하는 진 몰랐네 궁금하니 나오는 것마다 챙겨보겠음!

    • 2015-11-22 10:08
      ㅎㅎㅎ 엉 종종들러 읽어주숏~^~!

  • 2015-11-21 23:36
    할아버지 완전 빡세(?)셌네@@ 수영이는 고급조기교육을 받았구나. 이런~ 양갓집 규수를 몰라봤다니~~

    • 2015-11-22 10:10
      앗 주역동학늼~~~ㅎㅎ
      우리 주역 꼬물꼬물 쭉 같이읽읍시다욧@!!!

  • 2015-11-23 15:12
    아닛! 이런 코너가 숨어있어다니!!!!!! 진짜 박규수님이었구만!

  • 2015-11-29 00:24
    엇!! 수영샘 정말 재미있는 걸요^^ 새로운 조화석습 ?!

  • 2015-12-01 17:58
    첫화부터 한문공부 시킬줄 알고^^;; 이제사 보았는데 드라마가 있었네요 ㅎ 넘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