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3 일곱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12-04 02:32
조회
171
 

 

지난 5월 야심차게 시작한 규문 최고의 지혜+힐링 세미나, 불티 세미나가 벌써 시즌2의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불교 뿐 아니라, 티벳이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되고, 생전 읽어보지 못했고 아마도 읽지 못했을 ‘보서’들을 읽을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물론 처음 들어보는 개념들이 난해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 죽음에 대해서 배웠을 때도 그랬듯, 이번 시즌에 배운 인욕이나 자비에 대한 가르침들도 모두 불교의 심오하고 근본적인 통찰인 공성에 대한 깨달음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인욕 혹은 인내라는 수행은 단순히 감정이 나쁘다거나 제어하라는 상식적인 처방이 아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하나의 바라밀 수행은 그 안에 나머지 바라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완성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인욕이라는 수행은 다른 사람에 대한 보리심, 공성에 대한 지혜, 성실한 수행, 기쁜 정진, 선정 등의 실천 없이는 성공적일 수 없고, 또 인욕 수행 자체가 다른 측면의 수행을 촉진합니다. 그런 근본적인 통찰이 왠지 매력적이어서, 잘 이해되거나 체화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배워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는 이번 시즌의 마지막 텍스트인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달라이 라마께서 샨띠데바의 <입보리행론>의 9장 지혜품을 해설해주신 것입니다. 마침 낭송시간에 읽은 범위도 지혜품이었는데요, 이번 후기에서는 오갔던 이야기들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적어보려 합니다.

 

대승과 소승

먼저 대승과 소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불교가 하나의 결이 아니라는 점에 조금 놀랐는데요. 사실 그도 당연한 것이 기독교나 이슬람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부터 더 넓은 문화로 퍼져나간 불교가 단일할 리가 없습니다. 다만 앞의 종교들처럼 분파 갈등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번지지 않았을 뿐이지, 가르침의 해석과 수행의 강조점의 차이에서는 어떤 종교보다 치열하고 진지한 것이 불교였습니다. 그러니 불교를 하나로 대상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직 초심자인 저로서는 이것저것 여러 해석들을 배우는 것이 역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선 불교는 크게 대승과 소승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 기준은 부처님 입멸 후 전승되어온 경전의 정통성을 어디까지 인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오직 싯타르타 부처님이 생전에 설하신 법만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쪽이 소승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후에 여러 부처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설해진 법 또한 인정하는 쪽이 대승입니다. 사실상 더 넓은 경전과 수행법을 포괄하는 대승은 소승의 수행이 너무 좁고 한정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소승이라는 이름도 그런 비판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승은 상좌부 불교 혹은 테라바다라고 불리며 대승에서의 수행이 정통성을 벗어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음을 지적합니다. 둘은 구체적인 수행의 동기와 목표, 그리고 인정하는 교리에 있어서 몇 가지 차이를 갖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입보리행론>의 핵심인 ‘보리심’은 대승불교 수행의 핵심적 동기입니다. 세미나에서 한상선 선생님께서 양쪽의 차이를 짚어주시고 어느 한쪽의 시각(저희가 배우는 텍스트로서는 대승의 시각)에 치우쳐서 분별하는 것을 주의해야 함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전통 속에서 다른 방편으로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기 때문에 양측의 해석을 피교, 평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심자인 저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승의 경전이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임이 증명이 되든 안 되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 현재의 증거로는 부처님의 직설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우리에게 유익한 가르침이라면 여전히 배우고 수행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145쪽)

다만 달라이 라마의 이런 말은 생각해 볼 만 한 것 같습니다. 소승의 주장대로라면 부처님이 팔십이 되던 해에 완전한 열반에 드시고 완전한 무로 사라지셨습니다. 이는 “삼무량겁 동안 지혜와 공덕이 자량을 쌓고도 겨우 45년 동안만 중생들을 위해 일하셨다는 의미”(140쪽)입니다. 그러나 대승의 해석에서 부처님은 싯타르타라는 현실의 몸으로 나툰 화신 뿐 아니라 그 본질인 ‘존재의 본래 상태’에 머무는 법신이며 “법신을 기반으로 붓다의 이타 원력을 나타내는 다양한 형태의 몸”인 보신으로 계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이후에도 개별적인 수행자들은 각자의 업력이 무르익음에 따라 만달라의 본존들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으며 이런 비의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대승의 경전들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스승들이 고도의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추론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통해 그 경지를 맛보는 것입니다.” 역시 어떤 방법이든, 저로서는 무엇이 저 자신과 저를 있게 한 존재들에게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배우는 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무아 법무아

다음으로는 인무아와 법무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무아란 무엇일까요? 표현 그대로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음, ‘자아(아트만)’가 실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인무아란 주체 혹은 자기 것이라는 주관적 정체성이 없음을, 법무아란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객관적 정체성이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하지만 쓰고 있는 지금도 이것을 약간이라도 이해하거나 체험하는 수준이 아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 저는 견고한 인아와 법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다져져 온 이 습관을 풀어놓으려면 그만큼의 기간과 정성이 필요할 듯합니다(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그 일환이 될 수 있다면 하고 바래 봅니다).

어렵지만 저희도 무아에 대한 논의에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나’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형성하며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샨띠데바의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몸인가? 하나하나 ‘실증적으로’ 따져보면, 치아도, 두 손발도, 내장도, 심장이나 폐나 간과 같은 장기도, 뇌 자체도 ‘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각이 나일까요? 분노에서 평안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이렇게 휙휙 바뀌어버리는 정서를 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형성되어 있는 이런저런 이미지들도, 어떤 행동을 취하려는 동기들도, 식별하고 판단하는 의식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색, 수, 상, 행, 식, 모두가 자아가 아닙니다. 이렇듯 차분히 물어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실재로 존재한다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사물과 같은 대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라고 알고 있는 대상들도 역시 하나하나 분리하며 점검해보면 딱히 본질적인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모두 어떤 조건 속에서만 단지 잠깐 동안만 그것이며, 어딘가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현상은 없습니다. 무아와 무자성의 진리.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깁니다.

“쫑카빠 존자는 중관 철하그이 가장 큰 난점은 모든 현상의 실유를 부정하면서도 속제의 현실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급한 것처럼, 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은 ‘현상의 실유를 부정하는데, 어떻게 자기정체성을 일관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철학적인 난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173쪽)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무아 혹은 무자성을 이해하려 할 때 무엇을 부정하는가를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일체의 현상을 환이라고 말해도 손이 바늘에 찔린다면 우리는 아픔을 느낍니다. 찔린 나와 찌른 바늘의 존재감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하지 않고 엇비슷한 몸과 엇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는 확실히 유사성이 있습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지는 않습니다. 현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에서 겨울로 건너뛰는 법은 없고, 해는 늘 비슷한 패턴으로 뜨고 집니다.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해 보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본능에 저절로 ‘나타나는 자아’가 실제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173쪽), 그리고 “사건과 사물들에 실유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221쪽)을 강조합니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자아도 사건도 사물도 실재하지 않음을 이제까지 열심히 증명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대상들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존재방식’입니다. 존재는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220쪽)

책에서 소개되는 복잡한 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중관론자의 주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나 몸,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부정의 대상은 느껴지고 체험되는 모든 존재 혹은 사건이 아니라, 그러한 속제 차원의 상대적인 경험들에게 부여된 실체화되고 고정된 본질, 즉 자성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서 간주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실체성’이 부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느껴지는 ‘나’라는 의식이나 경험되는 “사건과 사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와 같은 사건과 사물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은 우리가 그것들을 실유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175쪽)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게 되는 나, 사물, 사건은 실유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들, 즉 세상 모든 것의 유일한 존재방식은 바로 ‘공’입니다. 헉, 그 무겁고도 무서운 글자인 공이 나왔네요. 이렇게 공이 나오면 위에서의 질문이 또 제기됩니다. 존재방식이 공한데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요. 공함과 존재에 대해서 달라이 라마가 설명해 주시는 대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제로 사건과 사물들이 공하다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체의 모든 사건과 사물들은 원인과 조건이 결합된 집합적인 특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서 자족성이나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독립성이나 실유성이 결여된 것이 바로 공성입니다.”(177쪽) 그러니까 공성은 없음 혹은 비존재라는 네거티브적인 것이 아니라, 있음이고 존재함이지만 쉼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변하는 채로, 다른 원인들에 의존하는 채로 있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요소들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달을 보는 습관을 만들기

이런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포함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들을 단순히 부정해버리는 태도가 아닌 방식으로 겪어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연속체로 보이는 것은 존재의 단일한 흐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로 인해 동일한 연속체로서의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200쪽)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로 고정된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요. 매 순간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속에 기본적인 연속성은 남아 있다는 것. 이것이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고 우리는 그 변화와 의존성을 다 보지 못하고 그것들이 실재한다고 왜곡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로 쓰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지요. 아마도 이것은 너무나 오래도록, 수많은 전생들을 거치며 그렇게 왜곡해 보는 습관을 강화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훈샘께서는 책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도 현존 속에서 체감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달라이 라마의 말씀이 떠올랐는데요. 달라이 라마께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들을 이용해 분석하는 과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사건과 사물들이 본질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도달한 현상의 무실존성은 궁극적인 공성이 아닙니다.”(220쪽) 분석을 통해 무실존성을 확인했다면 그 다음은 실증적인 수행을 통해 현상의 본질적 존재방식에 대한 탐구가 길게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40대에야 공성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떠올리면, 조급해하거나 한탄할 것 없이 천천히 그저 오래오래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편해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동안 들여온 습관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습관을 들이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한 선생님께서는 공성을 깨닫는 수행을 달을 보는 것에 빗댄 비유를 소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성에 대해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토론을 하면서 하고 있는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분석은 우선 달을 그리는 것입니다. 결코 달을 본적은 없지만 그것에 대해 듣고 상상해보는 것이죠. 그리고 수행이 무르익으면 어느 날 물에 비친 달을 본다고 합니다. 어렴풋이 삼매에 도달하는 차원일까요?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실제로 달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아마 달라이 라마께서 ‘공이 보인다’고 표현하신 것이 이런 차원이었겠구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달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듣는 일, 그것을 그리는 일, 그리고 달에 대해 말하고 묻고 그려보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과 그런 자리에 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도록 들여온 습을 푸는 방법은 다른 습을 들이는 것 뿐. 샨띠데바의 말대로 “공성 습기를 익숙하게 하여 사물의 습기를 버리게 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이 핵심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심이 과해져서 후기가 무척 길어졌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전체 2

  • 2020-12-04 19:25
    후기 쓰는 과정 속에서 민호샘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들이 들고나갔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유용한 생각이 뻗칠 때 욕심을 좀 과하게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2020-12-05 21:50
    오오, 불티 세미나 3번의 시즌만에 이런 훌륭한 후기를 써주신 우리 불목하니 민호샘은 정녕 부처님의 수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음껏 더 욕심을 부리셔도 됩니다. ㅎㅎ

    시즌 3의 마지막 시간까지 저희 나름대로 달을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그려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