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2학기 아홉번째 시간(6.25)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6-23 15:53
조회
104
“[개인주의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으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다. 첫째는 개인주의적 태도로서, 이것은 자기 나름의 특이성을 지닌 개인에게 부여된 절대적 가치와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제도에 비해 그 개인에게 허용되는 독립성의 정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둘째는 사생활에 대한 가치부여, 다시 말해서 가족관계, 가정에서의 활동형태들과 가산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부여된 중요성이다. 마지막으로 자기에 대한 관계의 강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교정 · 강화 ·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인식의 대상이자 행동영역으로 삼기를 요청하는 형식들의 강화를 들 수 있다.”(푸코, 《성의 역사 3 - 자기배려》, 나남, 58~59쪽)

푸코의 책을 읽으며 감탄하게 되는 것은, 텍스트를 다루는 섬세한 그의 세밀한 터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의 역사》 3권에서 푸코는 기원후 1, 2세기의 제정시대를 다룹니다.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이 시기는 ‘개인’이 강력하게 대두된 시기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 개인은 언제나 공동체 안의 개인으로, 그의 자기 통치는 늘 타자에 대한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죠. 타자를 통치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 자신을 알고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 같은 그리스 청년들에게 요구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에서 이러한 구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이전에 사람들을 붙들어 두었던 공동체적 울타리는 약화되었고, 그에 따라 자기 배려라는 주제는 개인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그런데 푸코는 이러한 상식적 설명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정시대에 이르러 개인이 등장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집단과 개인을 대립적으로 보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사회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에 대한 얼마간의 억압이나 제약을 함축한다고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하에 우리 시대를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된 시대로, 과거의 사회들을 전체주의적 체제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적 개인을 하나의 주어진 실체로, 개인주의를 이상이나 목적으로 설정하는 비역사적인 관점을 버리고 나면, 상이한 형식의 개인주의‘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푸코는 개인주의를 세 가지 형식에 따라 구분하는데, 첫 번째는 개인에게 부여된 절대적 가치와 집단에 비해 그 개인이 지니는 독립성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사생활, 가정에서의 활동 형태와 가산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부여된 중요성을 뜻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강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교정, 강화, 구원하기 위해 인식의 대상이자 행동 영역으로서 자기 자신을 요청하는 경우입니다.

푸코는 우리가 어떤 절차들 속에서 개인이 ‘되는지’, 우리 시대와 사회에서 개인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인지 질문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토론 때에도 이야기 나눴지만, 우리 시대의 개인에게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결여인 듯합니다. 우리는 삶의 어떤 영역들을 ‘사적인 것’으로 실체화하고, 또 우리 자신의 어떤 욕망과 쾌락들을 ‘취향’ 혹은 ‘선택’으로 둔갑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개인으로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개인에게 자유란 누구의 개입도 받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개인들이 이루는 집단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과정과 구별하기 어렵게 됩니다.

문제는 자유의 이미지가 너무나 편협하고 피상적인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받는 것으로서의 자유. 이웃에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이익을 추구할 자유. 이러한 기계적이고 단순한 자유 이미지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자기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문제(위의 도식에서 3번)는 볼 수 없게 됩니다.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자발적 실천이 개입될 여지가 사라져버리는 것이죠.

다음 시간에는 3장 '자기와 타인들'을 읽고 세미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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