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백 투 더 고대 그리스 3번째 시간(4.1)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3-29 23:21
조회
79
이번 주에는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피에르 아도의 책을 읽다보면 수도 없이 ‘생활양식’이라는 말과 만나게 됩니다. 아도는 “철학적 담론은 생의 선택, 실존적 선택으로부터 기원하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22쪽)라고 말하며 고대세계에서 ‘철학함’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를 인식하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철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우리는 해석해야 할 고정된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어떤 완결된 설명의 체계를 생산해내는 ‘저자’로서의 철학자를 상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식이란 정말로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설명해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일까요? 세계에 대한 철학적 표상이 참된 것임을 보증해줄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 인간의 인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인간은 그 세계를 바깥으로부터 조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세계’와 ‘인간’을 분리시키고 각각을 실체화하는 이러한 전제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데가 있습니다.

아도가 해석하는 고대철학의 접근방식은 이와 사뭇 다릅니다. 철학적 담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생활양식을 촉발하고 정당화하고 강화합니다. 세계에 대한 일관된 해석의 체계가 먼저 있고 그로부터 (마치 부록처럼) 윤리적 당위가 도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담론과 철학적 삶은 상호결정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인식은 세계를 재현하고 설명하는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미적으로 조형할 수 있는 삶의 기예로서 작동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일요일 서양철학 기초반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에피쿠로스주의자인 루크레티우스에게 ‘원자론’이라는 앎의 체계가 ‘영혼의 평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요청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원자’라는 근원적 차원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하고 이상을 꿈꾸게 하며 심판의 두려움에 떨게 하는 종교적 미신들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다양한 고대철학학파들이 있었고, 그들의 철학 담론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은 철학함의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변형하는 것이었죠.

저는 ‘생활양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생활양식’이라는 말은 큰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섭생을 조절할 것인가, 어떻게 우정의 관계를 맺을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우리는 사적인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건, 예술을 하는 사람이건, 기술을 연마한 사람이건, 어떤 종교의 독실한 신자이건 간에 삶의 양상은 대략 비슷합니다. 전문가, 제도, 상품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 것이죠. 그런데 아도가 소개하는 고대 철학자들은 삶의 기예로서의 인식 속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양식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앎이 아니라 실존의 기술로서의 앎. 아도의 책은 이런 낯선 철학함의 이미지에 매료되게끔 해주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매료되기만 해서는 안 되겠죠. 이번 뉴비기너스 세미나를 통해서 고대철학으로부터 철학과 삶의 어떤 비전을 길어올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다음주에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7, 8장(~288쪽)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성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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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31 21:24
    건화쌤의 세미나의 명확한 내용정리로 철학적 생활양식을 촉발하고 정당화하고 강화함이라는 낯선 철학적 담론과 마주대하게 되었고, 생활이라는 지점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런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삶의 기예로서의 인식 속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양식화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그들에게는 지금까지의 삶을 양식화해야될 뭔가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