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2 두번째 시간(6.1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6-08 21:08
조회
71
후기가 늦었습니다. 긴 방학이 쏜살같이 지나고, 지난 목요일에는 드디어 뉴비기너스 시즌2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가 개강했습니다. 입대를 앞둔 나한샘과 어머님 간병으로 바쁘신 태미샘을 포함하여 시즌1 멤버 전원이 함께 하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첫 시간에는 우리가 앞으로 9주 동안 만나보게 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훑어보고 제기될 법한 주제들의 간략한 스케치를 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본격적으로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고, 강력한 적과 맞서기 위해 뭉쳤던 그리스인들은 점차 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관습들이 섞이면서 서로 충돌을 일으켰고, 정치권력은 연이은 변동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학의 관심은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우주로부터 인간으로 옮아왔습니다.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선배 철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선이란 존재하는가? 인간은 그것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들어온 것이죠.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는 제기된 질문에 대해 대조적인 대답을 내놓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보편적 선이란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고, 설령 인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과 그것을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고르기아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는 관점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이끌어내고 있는 결론은 사물들은 인간이 그것을 경험하는 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혹은 인간은 자신의 해석을 겪을 뿐이라는 겁니다. 즉 ‘망치’라는 사물은 목수에게는 연장일 것이고, 과학자에게는 어떠어떠한 원소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일 것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장난감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물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것과 관계하고 있는 인간 자신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놓인 조건과 자신의 신체, 그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어떤 관념의 질서 속에서 사물을 인식할 뿐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아니, 상이한 상황들과 조건들, 관계맺음들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 외에 ‘대상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피스트들의 이런 인식론은 세련되어 보이지만 조금 허무하기도 합니다. 태미샘은 이들이 기존의 인식을 해체하기만 할 뿐 새로운 윤리적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질문하셨는데요, 저는 이게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라고 느꼈습니다. 가령 (비록 플라톤이 악의적으로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국가》에서 트라쉬마코스는 ‘올바름이란 강자의 편익이다’라고 주장하며 보편적 올바름을 정초하려는 소크라테스에 맞서는데요,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그가 이끌어내는 윤리는 쉽게 말해서 ‘막 사는 것’입니다. 올바름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없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최대로 추구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었죠.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올바름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굉장히 대담하게도 무엇이 옳은지 참으로 아는 사람은 또한 옳은 것을 행할 것이고, 그는 또한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보편적 선은 1세대 자연철학자들의 ‘아르케’와도 좀 다르고 기존의 관습이 주장하는 도덕과도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에게 보편적 올바름의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고귀한 삶입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덕과 앎은 하나입니다. 그가 말하는 덕(아레테)이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이며, 앎은 그 앎의 주체가 그에 대해 책임을 질 때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보편적 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누군가 ‘그게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소크라테스는 덕 있고 행복하게 사는 삶이 그에 대해 증언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앞서도 말했듯, 지난 시간은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씨름하게 될 문제들과 안면을 트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질문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매우 기다려집니다!

다음시간에는 <소피스트 운동>을 4장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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