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0811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8-16 21:43
조회
452
늦은 후기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시간엔 현옥쌤이 모두가 계속 헷갈리고 있는 코나투스를 다시 설명해주셨습니다. 스피노자는 “각각의 실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3부 정리6)고 말합니다. 이때의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이 바로 코나투스지요. 또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련될 때 의지라고 불리며, 정신·신체 모두와 관련될 때 욕구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코나투스’ = ‘현행적 본질’ = ‘욕구’ 인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스피노자가 이런 방식으로 실재의 현행적 본질을 규정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의할 때, 실재가 먼저 있고 그 실재에게 코나투스가 부여되는 게 아니라 코나투스가 실재 자체이며, 코나투스에 발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바로 실재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코나투스는 욕구이기도 하니까) 주체에게 욕구가 있는 게 아니라, 욕구가 주체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을 포함한 모든 것은 욕구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볼 때 코나투스는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 역시 코나투스의 발현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홉스의 코나투스를 비교할 수 있겠네요. 홉스는 (솔직히 잘 모르지만) 개체에게 귀속된 코나투스를 말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홉스에게 코나투스는 아주 좁은 의미의 개체의 이익추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홉스는 이것들이 통제 없이 발현될 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계약을 통해 이것을 억제하고 서로 피 보는 일 없이 적당한 선에서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겠죠.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스피노자에게는 이성에 따른 코나투스의 억제 따위는 불가능합니다. 스피노자는 사회나 공동체의 기능이 코나투스의 억제가 아니라 그것의 증대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실제로 사람들이 통제를 벗어났을 때 극도로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스피노자라면 코나투스의 좁은(작은? 최소한의?) 발현이라고 설명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이 코나투스라고 했습니다. 자기 존재 안에 존속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스피노자가 신을 정의할 때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스피노자는 신을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했었죠. 신은 자신이 스스로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점에서 ‘자기 원인’입니다. 인용한 구절은 신의 그러한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한 양태인 인간에게 코나투스란 부분적으로나마 스스로 원인이자 결과가 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적합한 원인(“나는 그 결과가 원인 자신에 의해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을 적합한 원인이라 말한다.”)이 되느냐에 코나투스를 ‘더와 덜’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적합한 원인이 되어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외부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주 1차원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 역시 아주 좁은 범위(?)의 코나투스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위를 활발하게 많이 하는 것이 코나투스의 더 큰 발현이고 행위를 더 적게 하는 것이 코나투스의 더 작은 발현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지요. 영향의 크고 작음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나투스는 이러한 변용하고 변용되는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우리가 적합한 원인이 되는 만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언가에 작용받을 때에만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것에 작용하면서도 수동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코나투스의 능동적 발현이나 수동적 발현, 기쁜 코나투스 혹은 슬픈 코나투스라는 개념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코나투스의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겠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코나투스가 발현되는 만큼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코나투스의 증대는 우리의 실존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양궁 선수가 활을 쏠 때 그는 자신의 활과 자신이 쏜 화살에 대한 적합한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코나투스는 그만큼 확대된 것이지요. 현옥쌤이 자주 드시는 예지만, 붓다의 경우 그의 실존은 상상할 수도 없이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코나투스가 증대될 수 있을까요? 정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신을 산출하고 있는 원인을 이해하는 것일 듯합니다. 물론 여기서 ‘이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바깥에서 관찰하는 행위와는 다릅니다. 적합한 이해는 그 자체로 적합한 원인이 될 것입니다. 이때의 이해는 또한, 자유의지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정신이 “다수의 실재를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도록 내적으로 배치될 때”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음... 솔직히 적합한 관념을 어떻게 갖게 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ㅠㅠ). 분명한 것은 스피노자가 우리의 부분적인 인식이나 그 자체로 수동적인 변용의 결과물인 감정들을 버려야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코나투스 얘기만 늘어놓았네요. 지난 시간에는 코나투스 뿐 아니라 정서에 대해서도 얘기 나눴는데, 저는 그 중에서 ‘명예심’이 재밌었습니다. 명예심이란 “오직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이러한 명예심은 타인들의 정서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람들이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미워한다고 우리가 상상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같은 것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는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또는 기쁨과 함께 쳐다본다고 상상하는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3부 정리 29의 증명) 그런데 재밌는 건 이러한 명예심이 “각각의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정서를 모방하는 행위는 곧바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려는 노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뭔가 못 담은 얘기가 많지만 이만 쓰겠습니다... 목요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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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18 13:58
    여전히 요령부득인 것들이 있긴 한데, 그나마 이해하기 수월하게 정리를 했구나. 글고보니 여기저기 후기 쓰느라, 건화 정말 열일 하누나~~^^ 나야 고맙지~~~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