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4/16후기] 차라투스트라 3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18-04-20 12:07
조회
101
차라투스트라 3번째 시간으로 제2부 앞부분을 같이 읽은 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지난주에 나왔던 힘의지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으신 분들은 『니체전집 17번 유고(1884년 초∼가을)』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참고하시라는 조언이 있었으나.... 참고도서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열화와 같은 성화가 있었습니다. 이번주 서로 오갔던 이야기를 엮어보았습니다~

신은 억측이다.

벗들이여, 너희에게 나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건대.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141쪽)

이 구절은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라는 제목에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행복의 섬은 차라투스트라가 머물고 있는 때는 온통 가을이고 하늘은 맑고 대기는 충만함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섬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신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 것이 아니고 가상의 저 너머만을 추구하게 하며 정작 삶은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조금은 거만하게 “그런 신이라면 나라도 신이 될 수 있지 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인간 적대적인 신은 억측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존재, 완전한 존재, 부동의 존재, 충족적인 존재, 불멸의 존재인 비유로서 신 대신 이제 우리는 창조자로서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한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의욕은 해방을 가져온다. VS 욕망은 우리를 구속한다.

의욕은 의지와 자유에 대한 참다운 가르침으로 이 의지가 신과 신들에게 등을 돌리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이 창조의 의지로 망치를 휘둘러 감옥을 부수고 위버멘쉬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라고요. 의욕은 어떤 것을 하고자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무력감이나 피로감과 대비되는 말로 쓰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변하지 않고자 하는 수동적인 힘도 엄청 쓰면서 살아갑니다. 채운샘이 내내 말씀하신 무지에의 의지^^, 사람들은 너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거죠. 이처럼 수동적인 힘을 쓰는 것도 의욕이라고 본다면 의욕이 피로감의 대비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긍정적인 힘들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창조의 의지로서의 의욕으로 보는 것이라는 훈훈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위버멘쉬 너~

붓다는 몸소 모든 것을 겪고 깨달은 자로서 가르침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니체 또는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스스로 위버멘쉬가 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위버멘쉬를 이야기합니다. 니체 VS 차라투스트라 VS 위버멘쉬의 상관관계가 궁금해지는 지점입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진실을 향한 투쟁자로서 끌어와 자신의 아바타로 내세우는 것인지? 위버벤쉬를 상정함으로서 또 하나의 신을 상정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위버멘쉬 너~ 무엇을 말하는지? 니체가 힘의지, 영원회귀에 대해 그렇듯이 여전히 위버멘쉬에 대해서도 “~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2부에서 이야기하는 연민이 깊은 자들, 사제들, 도덕군자들, 잡것들, 현자들, 고매한 자들 등등을 다 쳐내면서 기승전+위버멘쉬로 마무리합니다. 기존 잡것들을 쳐내면서 드러나는 형상이랄까요. 망치로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면서 점점 나타나는 위버멘쉬의 형상, 하지만 언제나 끝 또는 완성은 없습니다. 파괴 또는 無化처럼 보이는 작업이지만 그 자리에 바로 생성이 항상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극복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만약 차라투스트라가 이미 위버멘쉬가 되었다면 자기극복은 달성된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직 위버멘쉬가 되지 않음으로 끊임없는 자기극복의 과정을 말할 수 있는 논리가 뒷받침될 수 있다는 논리적인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똑 떨어지는 결과, 목적, 목표에 익숙해져서 이렇게 과정으로서의 위버멘쉬는 낯설기도 하고 그야말로 감이 안 잡히기도 합니다.

평등을 향한 의지

거대 독거미 타란툴라는 “앙갚음을 일으키는 폭풍우에 세계가 온통 휘말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정의지.”라며 평등을 외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도덕심을 가슴 깊이 새겨왔습니다. 누구나 다름을 인정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는 동등하게 대우 받아야한다고 배웠고 아이에게도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어떻게 모든 인간이 평등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평등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리의 가치 보전과 통제를 위한 균질성 확보가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보입니다. 고귀한 가치들을 아래로 끌어내림으로 동일성을 확보하는 방식, 약자가 강자를 비난함으로 끌어내리는 약자의 방식이 바로 우리가 내세우는 평등이지요. 그래서 숨겨진 앙갚음, 무력감의 광기를 평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평등하다고 상상하며 위대한 자들이 달성한 이미지들을 취해서 자기와 같은 레벨로 위안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마치 정규교육 과정이 끝나면 더 이상의 공부가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된 듯이 취급당하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이상의 앎을 추구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으며 단지 사회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는 부속품으로 살기에 만족하게 됩니다. 보통사람으로 평등하게 사는 법입니다. 고귀함과 비천함이 부정되는 대신, 모두 끌어 내려진 상태에서 빈부, 학력, 외모의 차별화에만 혈안이 됩니다. 또는 모든 기회가 평등한데 그것을 획득하지 못한 자들은 노력 부족자로 취급되기도 하지요. 이렇게 평등은 여러 가지 구실과 핑계거리로 이용될 뿐이지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평등해서도 안 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맞섭니다. 아름다움 속에서조차 싸움과 불평등이, 힘과 그 힘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 있다고 합니다. 중세시대의 멋진 교회 건축물들이 주는 성스러움 긴장감은 “둥근 천장과 아치들”이 서로 실랑이를 해가며 맞서 버티고 있는 힘들의 투쟁 때문이라고요. 그런데 타란툴라가 차라투스트라를 물어버렸네요. 벗이기도 했고 적이기도 했던 존재에게 앙갚음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아무리 자기가 춤꾼이라 해도 타란툴라의 독 때문에 타란툴라의 춤을 추기는 싫다고 자기를 기둥에 묶어달라고 합니다. 타란툴라에 물리면 독이 없어질 때까지 타란툴라 춤을 추어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재밌는 비유이지만 차라투스트라의 투쟁이 처절합니다. 춤꾼이지만 도취된, 앙갚음에 대한 욕망의 소용돌이의 춤추기를 거부하며 차라리 기둥에 결박되기를 바란다니까요.

참고로 타란툴라 춤추는 모습이다. https://youtu.be/X1ePzmQIrNs

이제 거놔반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네요. 아쉽지만 기대되기도 합니다.^^  꼭 에세이 시간에 뵈요~~~
전체 1

  • 2018-04-22 10:55
    오우 타란툴라 섬뜩하네요~
    저는 에세이를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별로 걱정은 안 되지만 그 동안 소니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