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11.12《선악의 저편》2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1-10 14:28
조회
115
드디어 《선악의 저편》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불교팀의 훌륭한 팀웍과 뉴페이스 영숙샘의 학구열(?)까지 더해져 첫 시간임에도 알찬 세미나였습니다~

1. 니체와 여성

《선악의 저편》의 서문은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니체는 왜 하필 진리를 여성에 비유했을까요?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봤다고 알려져 있는 니체지만, 역설적이게도(?) ‘니체와 여성’은 그가 죽고 나서도 끊임없이 회자 되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여성을 비하하거나 대상화하는 듯한 니체의 말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번 토론에서도 이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죠. 물론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각자 고민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니체가 어떤 집단이나 어떤 개인을 언급할 때, 그들 자체를 지시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의 역사를 ‘로마적인 힘’과 ‘유대적인 힘’ 사이의 투쟁으로 보고 있는데, 이때 니체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는 가치의 힘의지를 묻기 위함이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었죠. 그들에 대해서 어떠어떠하다 라고 규정하고 딱지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여성에 비유한 것도 진리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말하기 위함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격자화된 남성적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빠져나가고 흘러넘치는 여성적 힘으로서의 진리의 이미지.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이라는 말은 니체의 여성관보다는 니체의 인식론이 드러나는 비유가 아닐까요. 또 역으로 '여성'이라는 키워드에 꽂히는, 그리고 그에 대해 질문하는 우리의 힘의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집단적, 인종적, 성적 정체성을 통해 상대를 규정해서는 안 되며,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전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게 정말 아름다운 도덕이고 보편적인 윤리이기만 할 수 있을지?

2. 니체의 질문 방식

“우리는 이 의지가 가지는 가치에 관해 묻게 되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가정했는데,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가? 왜 불확실성을 원하지 않는가? 왜 심지어 무지를 원하지 않는가?―진리의 가치문제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아니, 이 문제 앞에 다가선 것은 우리가 아니었던가?”(니체, 《선악의 저편》, 김정현 옮김, 책세상, 15쪽)

《선악의 저편》 1절에 나오는 구절이죠. ‘진리의 가치문제’라는 말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은 원하지 않는가?”라고 할 때 니체는 정확히 무엇을 묻고 있는 걸까요? 니체가 비진리 또한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확실성과 지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불확실성과 무지를 평가절하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냐, 등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영숙샘께서는 니체가 진리 혹은 인식을 특정한 방식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생리학적인 요구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진리의 가치를 질문할 때 니체는 진리가 아닌 비진리 혹은 앎이 아닌 무지에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인식 바깥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설명방식에 따르자면, 우리는 어떤 인식과 판단이 생명을 촉진시키고 유지하며 종을 보존하고 육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채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생명, 본능, 힘)의 요청에 의해 어떤 인식과 판단이 채택되고 그에 따라 가치의 대립과 위계가 탄생하고 나면, 그러한 인식과 판단 그리고 가치는 독자적인 기원을 부여받게 됩니다. 인식은 그 자체로 참된 것으로 여겨지고, 가치는 그 기원에서부터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죠. 그러나 니체는 ‘보편적 진리’나 ‘인식을 위한 인식’,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 따위는 지극히 인간적인 편견일 뿐이라고 보고, ‘인식’ 바깥에서 인식을 발생시킨 힘(본능)의 관점에서 인식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3. 인과론 비판

‘자기원인’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 나눴습니다. 41절에서 니체는 ‘자기원인’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유의지’와 ‘부자유의지’라는 오류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토론이 길어졌는데, 결론지어진 것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자유의지와 부자유의지는 모두 자기원인이라는 자기모순을 요청하는 도그마라는 것이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듯, 니체는 자유의지를 일종의 문법적 오류라고 보고 있습니다. 행위와 주체를 분리시키고, 행위를 주체에 귀속시키는 논리.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니체가 자유의지 개념의 역전으로서의 ‘부자유의지’ 또한 비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기계주의적인 어리석음’을 언급하며 부자유의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실재들의 세계를 어떤 내부적인 동력도 지니지 않은 기계들의 세계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작용을 외부적 힘에 의한 결과로 바라보고 원인과 결과를 분리시킬 때, 결국 요청하게 되는 것은 이 세계 바깥의 외부적인 힘(신, 자기원인)이 아닐까요?

니체는 자유의지와 부자유의지 모두를 원인과 결과를 분리시키는 사고의 결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니체는 의지의 원인이 주체에게 있는지 주체 바깥에 있는지를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방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실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와 부자유의지가 아니라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의 문제뿐이라는 것. 여기서도 니체에게서 어떻게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변주되고 전도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다음주에는 《선악의 저편》 2, 3부(~105쪽)를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인상 깊었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한 구절을 정하고 그 구절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오시는 것 잊지 마세요~~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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