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1강 후기 / 자크 랑시에르 : 이미지와 실재, 그리고 정치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8-06-28 03:07
조회
190
Thinking Monday 이미지를 사유하다

 
  1. 자크 랑시에르 : 이미지와 실재, 그리고 정치


 

우리 삶에서 이미지란 무엇인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우리의 일상은 속속들이 이미지로 가득 차게 되었다. 글자마저도 층층이 쪼개져 읽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가깝게 되어가고, 온갖 매체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눈 앞 손바닥만 한 화면에서 재현되고 있다. 실재들을 표현하거나 담아두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 실재의 상像으로서의 이미지의 의미를 넘어서 과연 우리는 이 넘쳐나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미지와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고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자크 랑시에르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예술로서 인정하고 식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예술이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시선 또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랑시에르는 이런 배경을 ‘예술체제’라고 불렀으며, 미학의 역사로서 세 개의 체제로 분류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윤리적 체제, 그것이 얼마나 다른 것들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규범을 가지며 재현하고 있는가 하는 재현적 체제. 이 두 가지 경우와는 달리, 모방이나 재현의 기준이 아닌 아름다움과 미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 후에, 그 예술 대상들에 대한 존재 양식을 나타내는 미학적 체제가 있다. 이런 미학적 체제 안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은 그 사회와 담론, 문화, 시대성을 모두 포함한 특유한 감성 체제에 속함으로서 식별된다.

박물관에 전시된 수 천 년 전의 도자기. 가격을 떠나 문화유산으로서 천문학적 가치를 지니는 고대 유물은 예술일까? 아마 그것을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에게는 그릇 그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놓여있는 시공간적 관계조건, 여기서는 바로 그것이 예술을 예술로 느끼게 하는 감수성이 발휘되는 장치이다. 랑시에르는 과연 이미지와 예술의 미학적 가치가 어딘가에 분명하게 주어진 채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런 가치를 되묻는 순간 이미지가 갖는 정치적 측면이 드러나게 된다.

 

쿠르베의 ‘오르낭’이라는 작품은 자신의 고향에서의 장례식 풍경을 담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장례인지도 알 수 없고 사람들은 어떠한 위계도 없이 덩어리로서 뭉쳐져 있다. 이전까지의 그림에는 신적인 것, 신에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림에 주제였다. 그림에는 그려져야 할 것과 그럴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분명한 위계가 있었으며, 그것은 분명한 신성함을 띄고 보여져야했다. 또한 이전까지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던 민중. 예술의 대상으로서의 적합함, 가치 등의 사회·문화적 규범을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적절함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 이렇게 예술의 기저에는 체제로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기존 누드의 전통에 있어서의 코드를 무시했다. 코드란 이미지를 해석하도록 하는 체계이다. 기존까지의 누드nude화에서는 그것이 나체naked와 구분되게 하는 몇 가지 장치들이 있었다. 시선처리와, 입체감을 드러내는 명암, 숙연함과 신성한 느낌이 드는 구도 등. 그러나 올랭피아의 여인은 그런 코드들을 무시하며 캔버스에 납작하게 칠해진 나체로서 작품을 보는 관객들을 되래 구경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코드의 파괴와 구도의 비틂은 관객들로 하여금 불쾌감, 낯섦을 경험하게 한다.

마네는 나체화나, 예수의 죽음 등 이전의 유명 작품과 그 주제와 내용이 거의 같은 그림을 완전히 다른 양식과 배치로 그림으로서 그 이미지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관습체계에 분열을 일으켰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 있어서 거기에 코드로서 작동하고 있는 감성의 분할선이 어떻게 그어지는가를 주목했다.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설정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 감성의 분할은 분할된 공통적인 것과 배타적 몫들을 동시에 결정짓는다. 몫들과 자리들의 이러한 분배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참여해 소용되는 방식 자체, 그리고 개인들이 이 분할에 참여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하는 공간들, 시간들, 그리고 활동 형태들의 어떤 분할에 의거한다.” <감성의 분할> p14

'샘'이라는 제목과 함께 변기에 사인을 해서 미술관에 보낸 뒤샹. 심지어 그 사인조차 자기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떤 유토피아도 표현하지 않고, 창조라는 개념에 묶이지도 않는다. 예술은 창조와 동격이라는 기존의 관념에 묶이지도 않는다. 그냥 사는 행위, 사인, 미술관에 보냄. 끝. 뒤샹의 이 문제작은 “적어도 자기가 만들어야 작품이지 않나?”와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 등의 수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뒤샹은 기존 예술 행위에 입각해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냥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이 출품했다는 것, 미술관에 있다는 것이 그것을 작품이게 했다. 그리고 변기가 예술품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술가에 대한 담론과 미술관이 지닌 권력. 이 담론적 배치와 권력이 변기를 작품으로 만들었다. 뒤샹의 샘은 “이것도 예술이냐?”라고 물으며 예술에 대한 온갖 분할선들을 뒤흔들게 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앤디 워홀은 한 발 더 나간다. 아뜰리에도 아닌 팩토리에서 조수들이 찍어내는 상품이미지가 그의 예술이다. 사실상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컨셉만을 던질 분이다. 나머지는 조수들의 일. 자본주의의 생산 체계와 거의 동일하지 않은가? 예술을 상품과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어뜨려버리는 것이다.

“그런 게 예술이라면 나도 하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꼭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로 워홀이나 뒤샹처럼 될 수 없다. 뒤샹과 워홀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그들의 작품을 작품으로서 읽을 수 있는 관객들, 그들에게 문제를 던진다는 최초의 행위자로서의 의미, 컨셉 등이 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그 변기와 상품이미지는 그 혁명성과 문제성을 동시에 안으면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했다.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게 함과 동시에 ‘논란을 제기하는 혁명성’이라는 새로운 담론을 그 예술성의 체제로 삼는다. 질문을 일으킨다, 분할선을 떠오르게 한다는 혁명성과 위대함이 그것을 작품이게 하는 또 다른 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이처럼 아름답다는 감성은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느끼게 작동하는 체제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도록 주어진 선험적 조건 속에서 생각한다는 칸트의 견해,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대상은 형성된다는 푸코의 견해처럼, 감각적인 것과느낌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조건을 벗어나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감성이라는 가장 사적으로 보이는 것 조차도 이처럼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 개인의 감각도 체제와 담론, 시대와 배치, 연관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

“정치는 실제로 권력의 행사와 권력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특수한 공간의 구성이고, 경험의 특수한 영역의 분할이며, 공동으로 놓여 있고 공동의 결정에 속하는 대상들의, 이 대상들을 지칭하고 그것들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 주체들의 특수한 영역의 분할이다. (...) 정치는 공동체의 공동의 것을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며, 새로운 주제와 대상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이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시끄러운 동물들로만 지각됐던 사람들의 말을 들리게 하는 일을 한다. 대립을 창조하는 이러한 작업은 ‘정치의 미학’을 구성한다.” <미학의 불편함> p53-55

 

미술이 선험적으로 미·추를 내포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관객들은 할 게 없다. 예술이라 불리는 것 어딘가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을 거란 생각으로 미술관에서 끄덕거리며 작품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 이는 수동적 구경꾼으로의 전락이다. 이것이 예술이게 하는, 이걸 예술적인 것으로 느껴 미술관에 전시시켜 놓은 사람들의 감성에 작용한 체제를 찾아내야 한다. “이게 예술일 수 있나?”하고 처음부터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 예술을 마주할 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해석’이다. 그것은 그어져있는 분할선을 뒤흔드는 작업이다. 우리의 감각을 규정짓는 체제를 뒤흔드는 작업으로서의 해석.

‘이오지마’라는 사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와 실재 간의 간격이다. 과연 fact와 이미지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진에, 영상에, 기록에 작용하고 있는 분할선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지로서, 현상으로서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이 과연 실재일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편집된, 체제 안에서 일정 부분 굴절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실재를 과연 100%로서, 체제에 의해 연출되지 않은 대상으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나.

“이미지의 운명이라고 적합하게 불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예술의 조작, 이미저리의 유통양식, 그리고 예술의 조작과 이미저리의 형태로 하여금 이것들의 감춰진 진리로 향하게 하는 비평적 담론 사이의 이 논리적이고 역설적이 뒤얽힘의 운명이다.” <이미지의 운명> 39p

랑시에르가 당부하는 것은 예술가·미학자에게는 ‘분할선의 가시화’이고 관객에게는 ‘해방’이다. 우리가 접하는 예술이미지, 일상 속의 이미지에는 감각의 분할선, 인식의 분할선이 작동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분할선을 가시화 시키는 것이 작가와 철학자의 임무이지 않을까. 더 두껍고 오래된 분할선을 가시화시킬수록 충격은 크다. 뒤샹과 워홀, 마네 등의 작가들의 작품이 그렇지 않을까.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논의와 담론, 분할들이 이뤄지고 있는 장을 꺼내어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서의 역할. 그것은 ‘공동체의 공동의 것을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분할선을 드러내 보임으로서 새로운 대립을 창조해내는 작업으로서의 정치의 미학. 그렇다면 우리 관객들에의 역할은 뭘까?

“해방은 보기와 행위 사이의 대립이 의문에 부쳐질 때 시작된다. 해방은 말하고, 보고, 행하는 관계들을 구조짓는 명증성들 자체가 지배와 예속의 구조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때 시작된다. 해방은 보기 역시 이 위치 분배를 확인하거나 변형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이해할 때 시작된다.”<해방된 관객> 27p

관객의 역할은 해방. 이미지로부터의, 이미지를 통한 해방이다. 우리는 이미지 속에 있지 어떤 것도 실재 그 자체로 만날 수 없다. 그런 이미지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행방이 가능하다. 우선 우리가 그런 구조와 체제 속에서 감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해방은 거기서 시작된다.

“관객 역시 학생이나 학자처럼 행위한다. 관객은 관찰하고 선별하고 비교하고 해석한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그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종류의 장소에서 보았던 다른 많은 것들과 연결한다. 관객은 자기 앞에 있는 시의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시를 짓는다.”<해방된 관객> 27p

랑시에르는 관객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정상적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관객은 결코 수동적인 위치가 아닌, 배우와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시를 짓는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들을 통해서 역설적이게도 이미지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수많은 이미지를 연결하고 해석해냄으로서. 지어져 있는 시와, 행해지고 있는 퍼포먼스만을 구경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재료로 연결해 다른 시를 쓰고 다른 퍼포먼스를 한다.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이다. 이런 해석을 이해할 때, 우리는 관객으로서 그 자신이 자신을 둘러싸고 펼쳐진 분할선들과 체제들을 모아 다시 짠다는 의미에서 구체적 정치의 실천가이며 능동적 행위자로서 행위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뒤늦게 쓰는 사이에 역사적인 승리가 있었네요!

아쉽게 진출은 못했지만 그동안 갑갑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다음 시간 간식은 혜원샘, 규창샘입니다~
전체 4

  • 2018-06-28 11:24
    늦은 시간에 쓴 후기지만 북받치는 감회가 느껴지는 후기네요. ^^
    회화에 담긴 코드를 해체하는 것부터 회화를 해체하고, 나아가 예술의 범주까지 새롭게 정의되는 일련의 흐름이 계속 기억에 남네요. 앞으로 예술이 어떻게 될런지 조금은 망상(?)해보는 기회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예술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유명한 사람들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ㅋㅋ

  • 2018-06-28 11:34
    관객의 해방~ 수동적 관찰자, 감상자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 해석자로서 예술에 참여하기!? 미노 반장님의 '역사적인' 철월 첫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18-06-29 17:08
    저는 이번 강의를 통해서 러시아 구조주의라는 것을 처음 접했습니다.
    감각의 영역까지 길들이고 교정하려한 그 노력이 저는 숨막히더라구요.
    반면 예술작품을 높은 지위에 올려놓고 고가의 교환가치를 덧씌우는 방법은 더 세련되고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각의 영역 또한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재배치 된 것이라는 강의 내용을 들으면서
    지난 번 건화씨가 쓴 '바보야 문제는 취향이 아니야(맞나요? 건화씨)'라는 에세이가 떠올랐습니다.

    필기를 하다가 마무리가 안 되었는데, 민호씨 덕분에 마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고마워요~

    • 2018-06-30 20:32
      예 맞습니다 지현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