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이미지를 사유하다" 2강 후기 / 바뤼흐 스피노자

작성자
소담
작성일
2018-07-06 18:48
조회
156
이번 주 ‘이미지를 사유하라’에서 만난 철학자는 바뤼흐 스피노자였습니다. 스피노자가 이미지를 사유한다면? 사실 스피노자의 글에서 이미지에 대한 내용이 직접 언급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스피노자가 종종 스케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만약 스피노자가 그림을 그렸다면 어떤 식으로 그렸을까요? (스피노자의 그림을 상상해서 그린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이라는 책도 있다고 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등장하는 ‘상상’의 개념을 따라 그의 미학을 한번 상상해보았습니다.

 

모든 이미지는 왜곡이다

종이에 태양을 그려보라고 하면 흔히 노란색이거나 빨간색인 원형을 그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태양은 지구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실제 태양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흔히 우리가 태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태양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스피노자는 그런 이미지는 결코 대상 자체와 같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럼 무엇이냐? 태양이라는 이미지는 우리의 망막을 통해 대상을 왜곡하여 형성됩니다. 모든 이미지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거쳐 변용된 결과라는 것. 게다가 이런 이미지는 “태양의 본성보다는 내 신체의 상태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아리엘 수아미,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고 합니다. 노랗거나 빨간 원형인 태양의 이미지는 인간의 신체가 변용되어 나온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곤충들도 과연 이와 같은 식으로 태양을 지각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곤충에게 태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겠지만(…) 전혀 다른 신체에서는 이미지도 전혀 다르게 나타나겠지요! 그렇기에 이미지를 그 대상 자체라고 인식하는 건 큰 오류입니다. 흔히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어떤 사람을 좋다/나쁘다고 판단하지만 이게 모두 “개뻥”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대상이 신체를 만나는 조건 속에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지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체의 ‘변용’은 대상과 신체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대상 자체만으로, 아니면 신체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쉽게 오류를 일으키는 상상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스피노자는 상상 자체가 어떤 무지나 오류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상상은 하나의 역량”입니다.

 
또한 상상도 하나의 역량인 한에서, 상상은 이성을 보조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때에는 상상도 오직 정신의 상태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이 그 흔적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지 않는 그런 지성을 통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을 정도지요.>(발링에게 보낸 편지) (아리엘 수아미,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

 

상상은 지성과 분리되어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상상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상상을 떠나서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스피노자는 상상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다는 지점에 주목합니다. 대상을 한계 짓는 것도 상상이지만, 그 이미지를 뒤집는 다른 이미지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도 상상입니다. 그렇기에 이 역량을 극대화하여 인식의 범위를 키우는 데 상상을 활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상상을 통해 우리에게 습관화된 인식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지요.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보슈가 그림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위계를 무너뜨린 것처럼 말입니다.

 

두 가지의 빛, 두 가지의 신

여기 두 가지의 빛에 대한 시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크 미술로 대표되는 렘브란트의 미술 작품에서 등장하는 빛입니다. 그의 빛은 어둠과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드러납니다. 강의에서는 그가 그린 종교화를 주로 감상했는데요, 알 수 없는 광원이 비추는 빛의 중심에는 마테나 예수와 같은 중심인물들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반면 중심인물로부터 멀어지면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그림자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빛을 다루는 방식 속에는 사실 신에 대한 렘브란트의 시선이 숨겨져 있습니다. 황금빛은 신의 선함을, 어둠은 신에 대비되는 악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빛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어둠의 존재를 부각시킵니다. 빛은 어둠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죠.

반면 스피노자에게 신은 자연입니다. 만물은 모두 신을 가지고 있으며 당연히 신에게 소외받은 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에 선악이 없듯이 “모든 것은 자신의 역량을 가지고 존재”할 뿐입니다. 더 불완전한 것도, 더 완전한 것도 없이 모든 것은 그대로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있는 것이지요.

화가 베르메르는 스피노자와 거의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그가 실제로 스피노자와 친분을 쌓았는지는 의문이지만,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세 편의 에티카』에서 베르메르의 미술이 스피노자의 철학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렘브란트와 비교해 보면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는 굉장히 선명한 색채가 도드라집니다. 창 밖에서 들어온 빛은 작품 안 구석구석에 가 닿습니다. 만물은 모두 빛을 받아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가집니다. 램브란트의 그림자가 어둠인 반면 베르메르의 그림자는 또 다른 색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빛이고, 어두운 것은 어둠의 그림자가 아니라 한낱 빛의 효과일 뿐”(들뢰즈, 『스피노자와 세 편의 에티카』)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런 빛들은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빛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드러냅니다. 파울 클레의 ‘파르나소스 산’을 보면 네모난 여러 다른 색들이 모자이크처럼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색은 주변 색에 따라, 또는 배경이 되는 색에 따라 다른 느낌을 선사합니다. 다른 색들과의 관계성에서 존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고 클레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이번 강의에서는 스피노자의 '상상'을 따라 이미지를 사유해 보았는데요, '무한한'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상상이 신체의 한계를 말해준다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이런 대상을 인식하는 나라는 신체성을 무시하고 어떤 실체를 안다고 생각할 때, 랑시에르가 말했던 것처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불화가 생기는 게 아닐지요. 이제는 상상에 갇혀있을 게 아니라 상상을 통해 인식을 넓혀야 할 때...! 다음 주에는 어떤 강의로 상상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
전체 3

  • 2018-07-07 10:49
    대상을 한계 짓는 것도 상상이지만, 그 이미지를 뒤집는 다른 이미지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도 상상입니다.

    상상 속에서만 상상으로써만 인식하고 사유할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오히려 그 상상의 형태인 이미지를 통해 그 '불화'를 인지하고 분할선들을 넘어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그림자를 어둠으로 볼 것이 아닌 또 다른 색으로 보고 그 색채들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린 베르메르의 그림을 볼때처럼 뭔가 더 상쾌하고 시원한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2018-07-07 16:28
    서로의 이미지를 주고 받는 대화와
    공유되는 글을 통해 개인의 인식이 확장되네요. 1강과 2강의 후기 고맙습니다^^

  • 2018-07-07 20:16
    그렇군요....'무한한'이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는 상상은 우리 신체의 변용이기 때문에 우리 신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테죠. 하지만 '무한한'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말이 상상인 까닭은 바로 그 상상을 통해 우리 인식의 한계-환상, 망상, 고정관념 등-을 뛰어넘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군요.....덕분에 '무한한' 상상에 대한 제 인식의 지평도 넓어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