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우언 6, 양왕 1~4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7-31 11:52
조회
73
우쌤은 《열자》의 문장 중 상당수가 《장자》의 외·잡편과 겹치는 게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시간에 배운 범위에도 《열자》 〈황제〉편에 똑같이 나오는 구절이 많았습니다.

〈양왕〉은 ‘왕위를 선양(禪讓)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장자가 선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왕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쌤은 이 편의 주제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귀생(貴生)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왕〉의 문장들은 모두 “천하를 줘도 내 인생을 해칠까 염려된다!”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나타납니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등장하는데, 사실 요 임금 자리에 순 임금을 배치하거나 반대로 해도 상관없습니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어떤 맥락에서 얘기되는지, 장자는 그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는 게 포인트입니다. 이밖에도 우쌤은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여러 텍스트에서 다양하게 그려진다고 하셨습니다. 가령, 《한비자》에서는 법을 정비하는 데 힘쓰지 않고 애꿎은 노력을 기울인 무능력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사서》에서는 완전무결한 성인이었던 그들이 오히려 시대가 지나면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게 재밌었습니다.

 

陽子居南之沛, 老聃西遊於秦, 邀於郊, 至於梁而遇老子. 老子中道仰天而歎曰: 始以汝爲可敎, 今不可也.

 

양자거는 남쪽 패()땅으로 떠났고, 노담은 서쪽 진()나라로 유람을 갔다. [둘은] 교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위나라 대량()땅에 이르러 노자를 만난 것이다. 노자는 길을 가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이전에 그대를 가르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재목이 아니구나.”

 

이 부분은 《열자》 〈황제〉편에 그대로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는 양자거가 아니라 양주로 나옵니다. 양주의 책이 별도로 남아있지도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양자거를 양주로 본다고 하네요.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요(邀)는 ‘우연히 마주치다’라는 우(遇)의 뜻입니다.

구절의 상황은 제자인 양자거와 스승이 노담이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쳤을 때입니다. 노자는 자신에게 배우던 태도와 다른 평소의 모습을 보고 혹평하는 구절입니다.

시(始)는 ‘이전에’라는 뜻에서 향(向)과 통용됩니다.

 

陽子居不答. 至舍, 進盥漱巾櫛, 脫屨戶外, 膝行而前曰:向者弟子欲請夫子夫子行不閒, 是以不敢. 今閒矣, 請問其過.

 

양자거가 대답하지 않았다. 숙소에 이르러, 세숫물과 양치할 물, 수건, 머리빗을 준비하고, 신발은 문밖에 벗어두고, 무릎으로 기어가서 말했다.

이전에 제자가 선생님께 여쭙고자 했으나, 선생님께서 가시는지라 틈이 없었기에, 이런 까닭에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금 겨를이 있는 듯하니, 청컨대 [저의] 과실을 여쭙고 싶습니다.”

 

사(舍)는 ‘숙소’입니다.

관수건즐(盥漱巾櫛)은 각각 ‘세숫물’, ‘양치할 물’, ‘수건’, ‘머리빗’을 뜻합니다. 시중들 때 이런 도구들을 준비하는 걸로 표현합니다.

탈구호외, 슬행이전(脫屨戶外, 膝行而前)은 어른에게 혼난 뒤에 배움을 청할 때의 태도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신발을 신고 실내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문밖에 신을 둔 것이나 무릎으로 걸어가는 것은 겸손한 태도를 뜻합니다.

閒 이 글자는 ‘한가하다’의 뜻일 때는 “한”으로 읽고, ‘겨를’, ‘틈’의 뜻일 때는 “간”으로 읽습니다. 여기서는 ‘틈’이라는 뜻에서 “간”으로 읽었습니다.

 

老子曰:而睢睢盱盱, 而誰與居? 大白若辱, 盛德若不足.

陽子居蹴然變容曰:敬聞命矣!

其往也, 舍者迎將, 其家公執席, 妻執巾櫛, 舍者避席, 煬者避竈. 其反也, 舍者與之爭席矣.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 치켜대니, 그래서는 누구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정말 하얀 것은 얼룩이 있는 듯하고, 위대한 덕은 부족한 듯하다.”

양자거가 깜짝 놀라며 몸이 오그라들며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양자거가 여관에] 갔을 때는, 여관의 관리인은 [양자거를] 맞이하여 떠받들었고, 여관의 주인장은 방석을 들고 왔고, 그의 아내는 수건과 머리빗을 가져왔으며, 여관의 다른 손님들은 자리를 비켜주었으며, 옷을 말리던 사람은 화롯가 앞의 자리를 비켜주었다. [양자거가 가르침을 받고] 돌아갈 때는, 여관의 다른 손님들과 함께 자리를 다투었다.

 

휴휴(睢睢)와 우우(盱盱)는 다 눈을 부릅뜬 모습을 뜻합니다. 노자가 본 양자거가 자만하여 주변을 무시하는 모습을 묘사한 글자입니다.

대백약욕, 성덕약부족(大白若辱, 盛德若不足)은 《도덕경》 41장에 그대로 나오는 구절입니다. 너무 하얀 것을 얼룩진 것과 같고, 큰 덕은 부족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욕(辱)은 ‘얼룩’, ‘흠’을 뜻합니다.

축연변용(蹴然變容)은 깜짝 놀라서 몸이 오그라드는 모습을 묘사한 글자입니다.

왕(往)은 패땅으로 떠나다가 여관에 도착했을 때, 반(反)은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여관에 도착했을 때를 말합니다.

앞에 나온 사(舍)는 여관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 뒤에 나온 사(舍)는 모두 여관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가리킵니다.

가공(家公)은 여관의 주인장을 말합니다.

주를 참고하면, 노자가 양자거에게 전수한 가르침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입니다.

 

양왕(讓王)

 

堯以天下讓許由, 許由不受. 又讓於子州支父, 子州支父曰:以我爲天子, 猶之可也. 雖然, 我適有幽憂之病, 方且治之, 未暇治天下也.夫天下至重也, 而不以害其生, 又况他物乎! 唯无以天下爲者, 可以托天下也.

 

요 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선양하려고 했는데, 허유가 받지 않았다. 또 자주지보에게 선양하려 했는데, 자주지보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천자로 삼으려하는데, 그런대로 괜찮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내가 때마침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바야흐로 그것을 치료하고자 하니 천하를 다스릴 틈이 없습니다.”

무릇 천하는 지극히 귀중한 것이나,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삶을 해칠 수는 없다. 하물며 다른 사물이야 어떻겠는가! 오직 작위적인 의도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지 않는 사람만이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자주지보의 대답에서 유(猶)가 포인트입니다. 우쌤은 이 글자가 ‘그런대로’라고 번역하시면서, 무심하게,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모습으로 봐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심하며 왕을 맡아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요 임금과 대조되는 태도가 유(猶)라는 글자에서 나타납니다.

적(適)은 ‘때마침’이라는 뜻입니다.

유우지병(幽憂之病)은 우울증입니다. 자주지보는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왕위를 맡아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근심하는 요 임금입니다.

치(治)는 ‘다스리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병을 고치다’로 사용됐습니다.

유무이천하위자, 가이탁천하야(唯无以天下爲者, 可以托天下也) 이 구절은 그대로 《도덕경》 13장에 나옵니다.

 

舜讓天下於子州支伯. 子州支伯曰:予適有幽憂之病,方且治之,未暇治天下也.故天下大器也,而不以易生,此有道者之所以異乎俗者也.

 

순 임금이 자주지백에게 천하를 선양하려고 했다. 자주지백이 말했다.

내가 때마침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바야흐로 그것을 치료하고자 하니 천하를 다스릴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하는 귀중한 그릇이나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도()를 가진 사람이 세속의 사람들과 다른 까닭이다.

 

대기(大器)는 큰 가치를 가진 것. 유일한 보배 등등 귀중한 물건으로서의 천하를 말합니다.

 

舜以天下讓善卷, 善卷曰:余立於宇宙之中, 冬日衣皮毛, 夏日衣葛絺., 春耕種,形足以勞動., 秋收斂,身足以休食., 日出而作,日入而息, 逍遙於天地之間而心意自得. 吾何以天下爲哉! 悲夫, 子之不知余也!遂不受. 於是去而入深山, 莫知其處.

 

순 임금이 천하를 선권에게 선양하려고 했다. 선권이 말했다.

나는 우주 가운데 서서, 겨울에는 싸구려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거친 베옷을 입는다. 봄에는 밭을 갈아 씨를 뿌리니 몸은 노동을 하기에 충분하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이니 신체는 휴식하기에 충분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해가 지면 들어가 쉰다. 천지의 사이에서 자유로이 거닐면서도 마음은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다. 내가 무엇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슬프도다! 그대가 나를 알지 못함이여!”

끝내 받지 않았다. 이에 떠나서 깊은 산에 들어가니, [누구도] 그가 어디에 머무르는지 알 수 없었다.

 

선권(善卷)이라는 글자를 보면, ‘자신의 능력을 잘 말아서 내면에 간직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곧 진인(眞人)의 경지에 오른 사람입니다.

립(立)은 자립을 말합니다.

우주지중(宇宙之中)과 소요어천지지간(逍遙於天地之間)은 선권[眞人]의 정신의 경지에 대한 묘사입니다.

막지기처(莫知其處)는 《고사전》과 《신선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레퍼토리입니다. 왕위를 거부한 뒤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수명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 등등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舜以天下讓其友石戶之農, 石戶之農曰:捲捲乎后之爲人, 葆力之士也!以舜之德爲未至也, 於是夫負妻戴, 攜子以入於海, 終身不反也.

 

순 임금이 천하를 석호땅의 농부인 자기 친구에게 선양하려고 했다. 석호땅의 농부가 말했다.

애쓴다, 임금의 사람됨이여. 괜히 힘 쓰는 사람이구나!”

순 임금의 덕을 지극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며, 이에 남편은 [짐을] 등에 짊어지고, 아내는 머리에 이고, 자식들을 이끌어서 해안가로 들어가서는,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석호(石戶)는 지명입니다.

권(捲)은 ‘애쓰다’의 뜻입니다.

보력(葆力)은 ‘괜한 고생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처대(夫負妻戴)도 《고사전》, 《신선전》에 자주 나오는 구절입니다. 꼭 권력을 피하고 어딘가로 몸을 숨길 때 부부처대(夫負妻戴)와 비슷하게 묘사합니다.

휴(攜)는 ‘이끌다’의 뜻으로 휴(携)와 통합니다.

사실 권력을 피할 때는 해안가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해안가에 해적, 왜구가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해안가에 사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고사전》, 《신선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산으로 들어가지 해안가로 들어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大王亶父居邠, 狄人攻之., 事之以皮帛而不受, 事之以犬馬而不受, 事之以珠玉而不受, 狄人之所求者土地也. 大王亶父曰:與人之兄居而殺其弟, 與人之父居而殺其子, 吾不忍也. 子皆勉居矣! 爲吾臣與爲狄人臣奚以異! 且吾聞之, 不以所用養害所養.因杖筴而去之. 民相連而從之, 遂成國於岐山之下. 夫大王亶父, 可謂能尊生矣. 能尊生者, 雖貴富不以養傷身, 雖貧賤不以利累形. 今世之人居高官尊爵者, 皆重失之, 見利輕亡其身, 豈不惑哉!

 

태왕단보가 빈()땅에 살고 있었는데, 적인(狄人)들이 공격해왔다. [태왕단보는] 가죽과 비단을 바쳤으나, [적인들은] 받지 않았고, 개와 말을 바쳤으나 받지 않았고, 구슬과 옥을 바쳤으나 받지 않았다. 적인들이 구하고자 한 것은 토지였다. 태왕단보가 말했다.

다른 사람의 형과 살면서 그 아우를 죽이고, 다른 사람의 아버지와 살면서 그 자식을 죽이는 것을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겠다. 그대들은 모두 힘써 이곳에 살라! 나의 신하가 되는 것과 적인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찌 다르겠는가! 또 나는 이런 말을 들었으니, 땅을 위해 백성들을 해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떠났다. 백성들이 서로 줄지어 그를 따라갔으니, 마침내 기산(岐山) 아래에서 나라를 세웠다. 태왕단보야말로 생을 귀중하게 여겼다고 이를 만하다. 생을 귀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록 신분이 귀하고 부유하더라도 [몸을] 기르는 것으로 몸을 해치지 않고, 비록 신분이 천하고 가난하더라도 이익이 되는 것으로 형체를 고달프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높은 관직과 존귀한 작위를 가지고 있어도 모두 그것을 잃는 데 부담감을 가지니, 이익을 보면 그 몸을 잊는 걸 가벼이 하니, 어찌 어리석다하지 않겠는가!

 

태왕단보는 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를 말합니다. 기산(풍땅)으로 옮긴 인물로 여기에 그 스토리가 나옵니다.

적인(狄人)은 북쪽에 있던 오랑캐를 말하는데, 아마도 스키타이족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소용양(所用養)은 ‘먹고 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곧 토지를 말하고, 소양(所養)은 ‘먹고 사는 것’으로 백성을 뜻합니다.

장책(杖策)은 지팡이입니다. 먼 길을 떠날 때 지팡이에 의지하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됩니다.

상연(相連)은 고공단보를 따라 백성들이 줄지어 떠나는 모습입니다.

존생(尊生)을 다른 글자로 풀면 귀생(貴生)입니다.

중(重)은 ‘부담감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越人三世弑其君, 王子搜患之, 逃乎丹穴. 而越國無君, 求王子搜不得, 從之丹穴. 王子搜不肯出, 越人薰之以艾. 乘以王輿. 王子搜援綏登車, 仰天而呼曰:君乎君乎! 獨不可以舍我乎!王子搜非惡爲君也, 惡爲君之患也. 若王子搜者, 可謂不以國傷生矣, 此固越人之所欲得爲君也.

 

월나라 사람들이 삼대에 걸쳐 군주를 시해하였으니, 왕자 수()가 이를 걱정하여 단혈(丹穴)로 도망갔다. 그런데 월나라에 군주가 없자, [군주로 삼으려고] 왕자 수를 찾았으나 그럴 수 없었고, [마침내] 단혈에까지 찾아가게 되었다. 왕자 수가 나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월나라 사람들이 쑥으로 연기를 내서, [그를 나오게 하여] 왕의 수레에 태웠다. 왕자 수가 끈을 잡고 수레에 오르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군주가 무엇이기에, 군주가 무엇이기에! 어찌 나를 내버려둘 수 없는가!”

왕자 수는 군주가 되는 것을 싫어한 게 아니라 군주가 됐을 때의 걱정을 싫어한 것이다. 왕자 수와 같은 사람은 나라로 그 생명을 해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니, 이것이 진실로 월나라 사람들이 [왕자 수를] 군주로 삼고자 한 이유이다.

 

단혈(丹穴)은 동굴인데, 아마도 붉은 바위가 특징이었던 것 같습니다..

훈(薰)은 ‘연기를 내다’입니다.

艾 이 글자는 두 가지 뜻이 있고, 뜻에 따라 음이 다릅니다. ‘다스리다’라는 뜻일 때는 “예”로. ‘쑥’의 뜻일 때는 “애”로 읽는데, 여기서는 ‘쑥’을 뜻하는 “애”로 읽었습니다.

 

韓魏相與爭侵地. 子華子見昭僖侯, 昭僖侯有憂色. 子華子曰:今使天下書銘於君之前, 書之言曰:左手攫之則右手廢,右手攫之則左手廢,然而攫之者必有天下.君能攫之乎?

 

한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다투며 침략했다. 자화자(子華子)가 한나라의 소희후(昭僖侯)를 뵀는데, 소희후가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자화자가 말했다.

가령, 지금 천하 사람들에게 군주 앞에서 맹약하게 만들었는데, 맹약서에 이르기를, ‘왼손으로 움켜잡으면 오른손을 자를 것이고, 오른손으로 움켜잡으면 왼손을 잡을 것이나, 그런데도 움켜쥐고 있으면 반드시 천하를 가질 것이다.’라 했으니, 군주께서는 움켜잡으시겠습니까?”

 

한나라 소희후는 신불해를 등용한 군주입니다.

명(銘)은 보통 ‘새기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맹약하다’, ‘약속하다’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확(攫)은 ‘무엇을 움켜잡다’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땅을 갖고 싶으면 서명하되 서명하지 않는 다른 손은 버려라, 외물을 얻는 것은 너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는 얘기의 핵심글자입니다.

 

昭僖侯曰:寡人不攫也.

子華子曰:甚善! 自是觀之, 兩臂重於天下也, 身又重於兩臂. 韓之輕於天下亦遠矣, 今之所爭者, 其輕於韓又遠. 君固愁身傷生以憂戚之不得也!

僖侯曰:善哉! 敎寡人者衆矣, 未嘗得聞此言也.子華子可謂知輕重矣.

 

소희후가 말했다. “과인은 움켜잡지 않을 것이네.”

자화자가 말했다. “매우 좋습니다! 이로부터 보건대, 두 팔뚝은 천하보다 귀중하고, 몸은 또 두 팔뚝보다 귀중합니다. 한나라는 천하에 비하면 가볍고 또한 중요하지 않은 것인데, 지금 다투는 것은 한나라에 비하면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군주께서 진실로 몸을 근심하고 생을 해치면서까지 근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소희후가 말했다. “좋구나! 과인을 가르친 사람들은 많았지만, 일찍이 이러한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자화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우척(憂戚)은 둘 다 ‘근심하다’라는 뜻입니다. 척(戚)은 척(慽)과 통용됩니다.

경(輕)과 중(重)은 각각 하나씩으로 해석했습니다. 경(輕)은 내 생명을 기르는 것들로 토지와 부귀영화를 말하고, 중(重)은 몸, 생명을 뜻합니다. 우쌤은 이런 식의 화법은 양주학파의 계열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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