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6.13 주역과 글쓰기 후기

작성자
황리
작성일
2021-06-17 00:46
조회
108
뇌화풍과 중뢰진. 먼저, 明과 動이 상호작용하는 괘인 豊괘를 논하는 자리에서 우리 조에서는 우리 시대의 풍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네요. 자본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이 시대는 분명 외형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게 맞다, 아니 맞는 정도가 아니라 부풀어오를 대로 오른 풍선 마냥 터지기 일보 직전이고, 이에 더해 사람들의 마음 또한 거품으로 가득차 붕 떠 있는 상태임에 분명하다는 등 경험에 근거한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지요. 여기에 더해, 이런 상황을 두고 과연 豊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끊임없이 결핍을 강요하는 자본의 요구에 豊이란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백번 양보해 풍의 시대라 인정한다면 우린 어떻게 그 豊을 누릴 것이고, 또 그 속에서 우린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결론이야 뭐, 괘사와 상전에서 가르치는 바, ‘宜日中’과 ‘折獄治刑’의 공정함에서 더 많이 나가지는 못했지만, 성격상 오래 유지되기 힘든 豊의 시대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선 어쨌든 분배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고 그 한 방편으로 기본 소득의 문제를 대안으로 제시해 볼 수 있겠다는 등 대단히 현실적인 차원의 논의들을 주고받은 것은 나름의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기본 소득과 관련해 나온 얘기는 혜원이가 공지올리면서 얘기를 더 해주면 좋을 듯~~~^^) 채운 샘께서는 풍괘와 대유괘를 비교해 논의하시면서 일리치의 ‘conviviality’ 개념을 끌어와 풍요를 함께 누리기보다는 개인적 독점을 정당화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제도의 문제들과 풍요를 양적인 방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의 빈곤함에 대해 지적을 해주셨지요. 나아가 물질적인 풍요를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회는 빈곤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물질을 나누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 마음을 나누는 지혜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셨고요.

개인적으로 풍괘의 효사는 괘사와의 연결 지점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효사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경계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어 괘사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지만, 거적이나 휘장 같은 것들이 두텁게(豊하게) 가리고 있어 대낮에 북두칠성이나 작은 별을 보게 된다는 상황은 도무지 괘사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이미지(풍요의 시대)와 연결이 되지 않아 조원들끼리 이야기도 많이 나눴습니다만 아직도 요령부득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의 밝음을 두텁게 가로막음으로써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만 편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ㅜㅜ). 이뿐 아니라, 초구하고 구사에 나오는 ‘配主’와 ‘夷主’는 또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지 막막한 면이 있었고요. 다만, 상육효는 분명 융이 말한 바, 자기 신념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과 과거의 풍요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외부 타자와 능동적으로 관계 맺지 못하는 무능한 노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 같아 미구에 닥칠 저의 미래(뭐, 당장도)와 관련지어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으로 중뢰진. 震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젊음의 괘인 듯합니다. 살면서 천둥번개 맞을 일이 어디 젊음에 국한되겠습니까마는, 천둥번개를 그것도 쌍으로 맞을 일은 아무래도 내·외적 움직임이 확발하고 변화무쌍한 시기에 더 많이 생기지 않겠나 싶어서입니다. 다른 조들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으리라 짐작됩니다마는, 진괘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외부의 자극이 닥쳤을 때 두려워하고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일입니다. 이를 대상전에서는 ‘恐懼修省’로, 효사들에서는 여러 의태어(虩虩..)들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때 두려워하고 놀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말들이 좀 있었네요. 우리가 흔히 쓰는 용법으로 이해하면 겁먹고 물러서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되어 버리는데요, 확실히 주역이나 유학의 전통에서는 恐,懼,惕 같은 말들이 어떤 외부적 변화나 자극이 주어지더라도 자기의 본분을 잃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채운 샘께서 ‘戒愼恐懼’ 네 글자를 풀어주신 게 저에겐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戒는 계율과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맺은 약속이나 그 관계성을 깨트리지 않는 것, 愼 즉 신중하다는 건 편협하게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 그리고 恐懼는 상황이 전과 달라졌음을 경외의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으셨는지요들. 어쨋든 우리로선 끊임없이 닥쳐오는 변화와 자극 앞에서 그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오직 공부를 통해 자기성장과 자기조형의 동력으로 전환하려는 태도가 바로 ‘戒愼恐懼’가 아닐까 싶습니다. 융이 청년기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대극성을 통한 자기 의식의 확대’ 즉, 다른 힘과의 충돌 속에서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건져 올리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자기 확장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거듭되는 우레’를 보고 ‘恐懼修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상전의 가르침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입니다. 노년의 길목에서 소망할 수 있는(소망해야 하는!) 안티에이징의 길이 있다면 바로 이것 정도가 유일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진괘의 효사와 관련해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육삼효에 나오는 ‘震行’이라는 구절에 관한 것입니다. 육삼은 으로 인해 정신이 흩어지는 것이니, 을 발하여 가면 허물이 없으리라.” 저는 여기서 震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떨쳐나가고자 하는 내부의 힘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네요. 다시 말해, 우레가 치는 상황 속에서도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내적인 역량 또는 조건으로 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우리는 외부에서 나를 덮치는 것들과 그로 인한 분열과 모순들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만 자기를 강하게 성장,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에 나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 우리의 공부를 가로막는 장애로 인해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거든, 모두 ‘震行’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걸로요!!! 썬데이 자기구원의 시간이 4일 남았네요(ㅋㅋ). 다들 건강한 얼굴로 뵈올 수 있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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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7 11:20
    우리 시대가 풍요의 시대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빈곤하게 느끼는가!!ㅋㅋㅋㅋ 이 풍요로움을 나눌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라는 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풍괘가 주는 풍요로움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풍요로움과 전혀 달라서 정말 '깨는' 토론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