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11월 17일 공지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11-15 07:03
조회
127
안녕하세요~

예술 인류학 공지입니다! 조금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ㅠ.ㅠ 먼저 다음주 숙제부터 공지드릴게요~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을 끝까지 읽으신 다음 공통 과제를 써와주시면 됩니다^^


다들 첫 시간 어떠셨나요? 전 너무 좋았습니다~ 알쏭달쏭한 예술이 무엇일지 앞으로 계속 고민해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모두 후끈한 분위기 속에 토론을 참여해주셔서 덩달아 즐거웠습니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 지? 공통과제 다들 꼭 써오셔야 합니다!ㅎㅎ

-------------

예술은 무엇일까?

우리는 예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세미나 때에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무언가 ‘신경질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러니까 ‘우리’와는 무언가 다른 특별한 사람이 예술을 한다는 편견이 있죠.

 실제로 ' 예술'의 관념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라파엘, 미켈란젤로, 다빈치와 같은 걸출한 천재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자의식이 생겨났다고 해요. 하지만 이때만 해도 예술가는 왕실이나 이름난 귀족 가문의 소속으로, 외교 사절단에도 함께 동행하는 등 ‘공적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개념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상품화하면서 예술 또한 그 흐름을 피해갈 수 없었죠. 하지만 똑같은 모습으로 대량생산되는 공산품이 아니라, 그것과는 차별되는 유일무이한 ‘작품’으로서 특권화됩니다. 대중의 등장과 함께 그러한 대중 바깥에 머무는 고독한 천재가 만든 뛰어난 마스터피스라는 개념도 함께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부터 서양은 본격적으로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1917년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R.Mutt라는 이름을 새겨넣었을 뿐 아무 작업도 하지 않은채 공장품인 변기 하나를 전시합니다. 예술이 되기엔 터무니없이 ‘하찮아 보이는’ 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될 수 있다 없다’는 논쟁 자체보다는 이 작품이 예술에 대한 개념에 균열은 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이미 ‘예술적’인 역할을 다하는 듯 보입니다.

 이때부터 예술은 어떻게 상품으로부터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지, 어떻게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가지던 특권적 이미지 및 환상을 깨고 삶과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예술은 시대적 산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예술이 가진 독특한 위치라고 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바로 그러한 예술의 특징을 라스코 동굴에서 찾는 듯 합니다.

 왜 굳이 자신들의 마을과 동떨어진 곳으로 굳이 찾아가, 입구도 좁은 곳을 따라 어두컴컴한 곳에서 동물을 그려야 했을까? 사냥 연습이라는 가설을 세우기엔 그 그림이 너무도 정교했고, 압도적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려진 동물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냥했던 동물도 아니라고 해요. 레비스트로스는 그들이 ‘먹으려고 그린게 아니라 생각하려고 그렸다’고 주장합니다.

대칭성의 세계

 어두운 동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그들은 어떤 것도 코드화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코드화되지 않은 세계’입니다. 우리가 문화를 이루고 사는 것은 바로 그 자연에 코드를 부여하면서부터입니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이것은 저것과 다른 ‘비대칭성’의 세계가 만들어 지는 것이죠. 낮과 밤이 구분 되어야, 이 공간과 저 공간은 달라야 우리는 약속을 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코드화된 세계, 우리의 문화는 근원적 억압입니다.

 고대에서는 그러한 비대칭성의 세계를 주기적으로 ‘뒤엎었다(?)’고 합니다. 축제 등을 통해 ‘어른, 아이’, ‘남성, 여성’, ‘귀족, 천민’ 등의 경계를 흐리고 뒤섞였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주기적 순환으로 비대칭적이 삶이 경화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신화 또한 비대칭성 세계를 전복하는 여러 상징들로 가득하죠.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세계 및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 즉 윤리적 태도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저 동물이 사실은 돌아가신 내 할머니라면? 저 동물이 굶주린 우리에게 일부러 와준 거라면?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이 현실 재현이 아니라 ‘잉여’라고 채운샘이 말씀하신게 기억에 남습니다. 코드의 세계, 격자의 세계를 흘러넘치는 무의식, 이야기, 상징. 예술은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비대칭성 세계를 비틀면서 ‘무궁무진한 의미’를 생성합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나타내려 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표현했는가(형식)를 통해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인 걸까요? 이렇게 보니 뒤샹의 변기는 ‘다른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로 불릴 만하군요….ㅋㅋ

 사티로스는 반인반수의 정령으로, 대칭성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성의 분화를 넘어가고, 미로에 있으면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잡아먹습니다. 그는 못생겼고 끔찍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혜의 원천을 상징하며 삶과 죽음의 근원의 성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흉칙한 것 속에 진실이 있다’. 온갖 것들을 따로 따로 분류해 놓은 비대칭성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볼만한 것들만을 선별하여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치워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추악한 진실’을 완전히 삶 바깥으로 내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간 대면해야 하는 죽음은 외면하려다 더욱 끔찍하게 우리를 잡아먹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대 미술가 매튜 바니는 비대칭적 세계를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여줍니다. 분화되었던 남녀가 결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정령의 모습과 혼동된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추를 매달거나 엄청나게 무거운 도구를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분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근원적 억압에 묶여있는 조건 안에서 어떻게 하면 그 분별들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지를 고민해주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체 2

  • 2018-11-15 14:01
    세미나 시간에 다들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예술과 관련된 개념에 대해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3장을 읽으면서 더 확장되는 생각은 예술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이 있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라는 점이에요. 이번주에는 어떤 예술의 모습과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 2018-11-23 23:22
    예술의 여러가지 얼굴 중에서 '추악한 진실'이 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