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6주차 후기

작성자
지안
작성일
2021-06-14 22:12
조회
128

6주차 1,2교시에서 저희 (민호 없었던) 민호조가 토론한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히 후기를 정리하겠습니다.


[1교시]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저희는 <안티 크리스트> 50절과 관련하여 크게 믿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니체는 기독교적 체계에서 믿음이 일종의 효력 증거로서 기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효력 증거란 '믿음에 의해 약속된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다시 한번 믿는 것'(289)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믿음'이 진리라는 것은 어떤 타당한 근거에 의해 입증된 것이 아니고 그저 믿음이 진리이도록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재차 믿는 것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이지요. '믿음이 복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따라서 그것은 참이다.' 라는 공식은 그렇게 성립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만의 믿음 체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양상은 다르지만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령 수연샘의 경우 '뿌린 대로 거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대한 인과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수능이라는 사건은 그 체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충격을 주었던 것이지요. 은옥샘의 경우도 부자나 성공에 대한 이미지를 강력하게 받치고 있는 것으로서 '열심히 하면 보상받고 성공한다.'라는 견고한 전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근면'이라는 당위가 생겨난 점도 얘기해 주셨습니다. 루이샘은 우상을 섬기는 자로서 기독교주의자들에 대한 선생님 자신의 불편함을 말씀해 주셨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든 삶에서 확실한 무언가, 그리하여 내가 의존할 무언가를 찾는 우리들 자신 또한 기독교주의를 믿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언급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 또한 그 뿌리가 기독교적 체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43절에서 니체는 불멸성과 영혼의 구원을 원하는 것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떻게 정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자유의지가 근본적으로 같은 원리를 가지는지 어렴풋하지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신에 대한 맹신과 우상화는 고스란히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자아에 대한 믿음으로 자리바꿈됩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주체를 찾으며 책임소재를 따져 묻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옛날 사람들보다 똑똑이라고 자부하지요. 발생한 일의 원인을 고작 나나 너에서 밖에 볼 줄 모를뿐더러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우매함. 모든 우주적 관계와 인연 조건을 헤아릴 줄 모르는, 편협함의 출처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생각해 보아도 세상 일이 나 중심으로 돌아갈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부딪히는 사건의 현장에선 왜 매번 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리셋'되는지... 정말 누군가 보고 있다면 꽤나 코미디가 아닐까...ㅎㅎ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 밖에도 흥미롭게 얘기 나누었던 주제는 앞서 50절 말미에 니체가 말한 '양심'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인영샘께서 이와 관련된 얘기를 쓰셨고 현주샘께서 인영샘이 쓰신 '양심'에 대해 질문해 주셨지요. 이 단락에서 니체는 진리가 이중 믿음의 메커니즘으로 그저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문제가 아니라 애써서 한 걸음씩 쟁취되어야 한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에 엄격하다는 것 즉 진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우리를 지탱하고 또한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던 모든 익숙한 지점들을 포기할 수 있는 영혼의 크기를 말하고 있는데요. 인영샘께서 이를 자신에게 솔직함으로 해석해 오셨습니다. 인영샘 해석과 관련하여 내 문제와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솔직함이 니체가 말하는 양심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었어요.


끝으로 순이샘께서 261쪽 34절에 나오는 니체식의 '천국'에 대해 얘기해 주셨어요. 니체는 천국을 마음의 특정한 상태로서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순이샘께서는 이를 단테가 망명 시절을 겪으며 그 자신이 처한 절박한 삶 속에서 신곡을 쓴 것과 연관되어 함께 읽혔다고 말씀하셨어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것은 다름 아닌 내 삶 속에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천국 개념과 맞닿아 있을 수 있겠다고 이해했습니다. 저는 갑자기 신곡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


[2교시]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먼저 스타브로긴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공통된 의견은 그는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매력적이라고 느꼈지요. ㅎㅎ 세부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다, 미/추 선/악을 넘는 인물 같다,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다 등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은옥샘께서 스타브로긴의 모순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특히 그의 두 가지 행동, 비밀 호색회에 가담한 것과 절름발이로 묘사되는 마리야와의 결혼 등의 행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습니다. 스타브로긴은 악령에 나오는 여러 사상들에 영향을 주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러한 면과 비교해 볼 때 앞의 두 행동은 전혀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죠. 이에 은옥샘은 그가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인물로 보인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르게는, 그 자신은 일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선도하지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에 의해 우상시되고 행동들도 어떤 프레임으로 해석이 된다는 점에서 위선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끼릴로프의 자살에 대해서도 얘기가 많이 오갔는데요. 그는 분명 행복에 대해 깨달았는데 왜 자살했을까?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생과 사가 일종의 하나로 반복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무'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죽음일까. 자살에 대해 스타브로긴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와 끼릴로프의 관점 차이가 드러나는데 여기서 스타브로긴이 달나라 얘기를 꺼낸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여러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만 쉽사리 어떤 결론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


더불어 이념과 행동의 모순을 보여주는 전형적 관념주의자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믿음 체계를 만들고 또 허무는지 샤또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도 주고받았습니다. 끝으로 현주샘께서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우리가 이 인물들이나 소설에서 니체식의 진리의 실천, 한 발씩 쟁취하는 진리 추구에의 실천이나 행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라는 물음이었어요.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가져가봐야 할 화두인 것 같아요. 우리에겐 아직도, 한층 더 두꺼워진 (하)권이 남아 있으니까요! 차차 찾아 보는 것으로 하고 마무리 지었습니다. + 인영샘(인영샘은 디테일 맛집!)께서 악령 등장인물들의 이름 유래에 대해 몇 가지 귀띔해 주셨어요. 스타브로긴은 ‘예수’, 샤또프는 ‘흔들리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남은 악령도 힘차게 읽어보아요!!! 힘!!!

전체 6

  • 2021-06-15 09:45
    힘!!! 이 느껴지는 후기네요!
    정말 세계를 나 중심으로 도는 조잡한 무대로 생각하는 이 코미디는 언제 그칠지...
    믿음의 효력 증거도 그렇고 문득 저희는 정말 세계를 엉망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론내려지지 않고 오갔던 말들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1-06-16 10:29
      네. ㅎㅎ 엉망진창으로 보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ㅎㅎ 총체적 난국이긴 한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또 이렇게 머리를 맞대보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언제나처럼 힘 넘치는 세미나였지만 반장이 없어서 약 5프로? 가량 아쉬운 세미나 였답니다. ㅎㅎ

  • 2021-06-15 12:52
    제가 개인적으로 스포 엄청 좋아하거든요. [악령]출간 당시 마지막 장 ‘찌혼의 암자에서’ 부분이 삭제 됐다가 작가 사후 부록으로 포함돼 출간 됐다고 해요. 그 장이 너무 궁금해 그 부분부터 읽고 스따브로긴을 이해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악령] 하권 맨 뒤에 있는 해설서를 참고하면서 인물들 성격을 염두해 두고 읽고 있답니다. 스타브로긴은 ‘십자가’, 뾰뜨르 베르호벤스키는 ‘지배’, 샤또프는 ‘흔들리다’는 의미를 이름에 담고 있다고 해요. 상권 맨 앞에 인용된 [루가의 복음서]에서 악령들의 간청으로 예수가 악령들을 돼지 무리들 속에 들어가게 하자 모두 비탈길로 내려가 호수에 빠져 죽는 내용이 매우 의미심장하잖아요. 저는 스따브로긴이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와 같은 인물일까? 아니면 악령에 들렸다가 멀쩡해진 예수 앞에 앉은 인물인지, 어떤 힘의지인지 궁금해요. 지안샘이 이 인물에게 느끼는 매력일지도 모르지만 ‘증말 이넘이 어떤 넘인지 궁금해요’ 채운샘이 니체의 도덕 판단이 어떤 징후를 보여 주는가 라는 관점과 도덕적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는 점을 염두하고 [악령]을 읽으라는 점을 상기하며, 스따브로긴의 매력을 파헤쳐 보고 싶네요ㅎㅎ! 함께 힘을 내서 남은 [악령] 읽어보아요!!!

    • 2021-06-16 10:34
      아 스타브로긴이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군요~~ 아 근데 정말 제가 지난 시간에 (중)권을 많이 못 읽어서(죄송;;) <악령>에 많이 못 들어가고 있다가 이번주에 마구 읽고 있는데 (여전히 갈길이 넘나 먼...) 인영샘께서 말씀해주신 스포 덕에 좀 더 읽을 때 착착 붙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러시아 사람들은 이 뜻을 알고 읽지 않았을까 생각하니까 좀 더 흥미로워지더라구요!

  • 2021-06-15 12:59
    ‘습관성 리셋증후군’이라는 말도 있던데,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고 용감하게 대면하기를 회피하는 저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에세이 회피 증후군요ㅠ). 지안샘의 말처럼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가 얼마나 유아적인 생각인지 알면서도, 속삭이게 되는 코미디, ‘그래도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구...’하며 리셋되는 습관들ㅎㅎ;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통찰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한 걸음씩 쟁취해나가기 위해 나와 타인들이 왜 필요한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모순에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고, 반대로 타인의 모순에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만 엄격한 것은 똑같다’ 이 두 경우 뿌리는 같고 증상만 다르게 드러난 것, 이렇게 적고 보니 이 자체가 모순 덩어리네요. 저~번 과제에서 지안샘이 예술에 대해 언급했던 ‘데카당적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데카당적 해석만 있을 뿐이다’(제가 이 문장에 꽂혔어요 ㅎㅎ) 라고 했던 부분을 여기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데카당적 삶은 없다, 데카당적 해석만 있을 뿐이다’ 라고요. 편협한 관점 즉, 한 방향으로 보고 그것만 ‘좋다, 옳다’ 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데카당적 해석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 2021-06-16 10:43
      네 습관성 리셋증후군 ㅎㅎ 이건가봐요. 우리가 겪는 병이 ㅎㅎ 그때 니체가 예술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 제가 꽂혀서 ^^ 다시 한번 여기에 인용해 봅니다~
      (우상의 황혼 162쪽 24절)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이것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가 전달의 천재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제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