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2주차(8.7)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8-03 11:25
조회
117
 

 

꿀맛 같은 긴 방학이 끝나고 3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무더위가 가시진 않았으나 이제 조금 주춤한 듯 바람이 살랑 부는 것 같죠? 이제 다시 텐션을 올려서 루쉰 소세키와 함께 늦여름과 가을을 재미나게 절.차.탁.마 해가 보아요! 승연샘이 너무나 잘 써주신 후기 덕분에 따로 정리할 내용이 거의 없네요ㅎㅎ. 여기에서는 코멘트와 강의 중 몇 가지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를 적어 보려구요.

우정에 대한 코멘트에서는, 자신이 어떠한 벗을 원하며 동시에 어떤 벗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는 자신의 족쇄를 풀 수는 없지만, 자신의 벗을 구원하는 사람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벗’이라는 말은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벗은 동류 혹은 닮은꼴은 아닙니다. 나를 편하게 해주고 다독여주고 계속 그대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는 족쇄를 풀어줄 수 없지요. 물론 그렇다고 저 멀리의 드높은 스승과도 조금 다른 듯합니다. 일방적인 교육-수혜 관계는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상호적인 측면이 적은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니체가 말하는 벗에서 중요한 점은 그 역시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자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저기서 자신처럼 스스로의 족쇄와 씨름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어딘지 소중해 보이는 것입니다. 다르긴 달라도 그로부터 스스로의 문제를 푸는 데 힌트를 얻고, 자신 역시 그에게 어떤 방식의 도움을 줍니다. 이것은 유유상종이 아닙니다. ‘너도? 나도!’라는 식으로 취향이 잘 맞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다른 성향이고 다른 조건이지만 자기방식으로 계속 자신이 고착된 자리를 의문시하고 떠나려는 존재들이야말로 서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윤회란 작은 차원에서는 사고방식과 행위의 쳇바퀴를 말합니다. 즉 자신이 계속 걸려 넘어지는 자리를 알고 그것을 문제화하는 자가 수행승이며, 그런 수행들의 우정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힘이 센 우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는 노예나 폭군은 벗을 사귈 수 없다고 했죠. 왤까요? 니체가 보기에 자신이 어디 갇혀 있는지도, 갇히긴 한 것인지도 모르는 자는 노예입니다. 그리고 그 노예가 물리적으로 덩치가 커져서 다른 존재들을 내리누르면 폭군이 됩니다. 도통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꿈틀거림으로부터 영향받을 수 없는 자는 벗이 될 수도 벗을 사귈 수도 없습니다. 잘해봐야 아첨꾼이나 노예를 거느릴 뿐이죠. 연구실 생활을 이어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우정을 만나가고 있는 제게는 곰곰 생각을 해가지 않을 수 없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글을 담백하게 쓰는 것에 대한 코멘트가 기억에 남습니다. 아기는 오물과 함께 태어난다고 했던가요? 에세이를 쓰거나 글을 쓸 때를 떠올려보면, 열병과도 같이 온갖 잘리고 흐릿한 망상들이 머릿속에 가득한 채로 한 문장 한 문장 꾸역꾸역 쓰곤 합니다(저는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혹은 앞뒤를 연결되게 설명하려고 가져왔던 잉여가 엉겨붙어 넘쳐나지요. 채운샘은 바로 그런 잉여를 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빼기의 능력이 글을 쓰는 기초 근력이기도 하다고요. 무엇을 쓰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떻게 적어야 명료하고 담담할 것인가.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 빼고 벼리는 추상화의 과정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달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미사여구나 군더더기를 쳐내기.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결하고 심플한 문체의 글이 힘이 없거나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채운샘은 헤밍웨이와 하루키를 예로 드셨는데, 하루키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하루키를 좋아하면서도 왜 하루키처럼 쓰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까요? 아무리 아마추어여도 자기 글의 구성과 풀어내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는 있습니다. 없어도 되는 말들, 숙고되지 않은 말들을 그냥 내뱉는 것은 좋지만 그럴 때조차도 이 글이 전달이고 연습이라는 점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꼰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재미없고 뻔한 말을 하고, ‘라떼’를 남발하는 어른이라고 해서 꼰대가 아니라는 말씀이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과 함께함이 마구 신나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내가 좋다거나 맞다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모두가 동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가장 꼰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통칭하는 꼰대들도 그런 특성 때문에 꼰대인 것이구요. 그것은 나이나 말투나 개그코드 등으로 가름되는 것이 아닙니다. ‘꼰대가 싫다’고 손가락질하고 상종하지 않으려는 소위 ‘젊은 세대’들의 속좁고 고집스런 태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태도야말로 꼰대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이런 말씀들이 무척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여기서도 필요한 것은 니체가 말한 우정일 듯합니다. 어느 자리에 있건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기. 그리고 그렇게 질문하는 자들과 만나기. 그 작업 없이는 우리는 노예이거나 폭군이거나 그 둘의 다른 이름인 꼰대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학기에 저희가 읽을 루쉰과 소세키는 한 세기 전 인물들임에도 가장 꼰대스럽지 않았던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중국과 일본이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몰려오는 근대 속에서, 전통주의에도 서구주의에도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붙지 않고 계속 빠져나가고 빠져나가며 펜을 들었던 아시아의 두 인물이 바로 루쉰과 소세키였습니다. 그들의 글이 니체와 어떻게 만나질지 기대가 되네요!

 

다음 주 공지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서문과 1장과 2장(~122쪽)을 읽고 함께 토론해볼 두세 구절 뽑아 그 이유를 적어옵니다.

-<외침>의 ‘서문’, ‘광인일기’, ‘약’, ‘두발 이야기’, ‘고향’, ‘아Q정전’을 읽습니다.

-1)‘광인일기’의 마지막 구절을 해석해보고 2)‘아Q정전’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아Q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등을 생각해보는 글을 써옵니다.

 
전체 2

  • 2021-08-04 08:43
    아Q정전은 민호샘이 언급한 폭군, 노예, 꼰대 종합선물세트 같아요. 이들과 함께 살고 혁명을 꿈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이번 주 과제인데 정말 어렵네요. 이 질문을 품고 아Q정전을 읽으니 이 질문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함께’라고 하는 말을 쉽게 쓰는데 이 말의 무게도 앞으로 달라질 것 같아요. 민호샘이 말한대로 자기 성찰과 우정과 관용도 결국 타자들이 있어야 가능하죠. 그런 의미에서 타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우정’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생각해 보는 노력이 제에게는 필요한 것 같아요.
    근대의 가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펜을 든 루쉰과 소세키를 가장 꼰대스럽지 않은 존재라고 한 표현이^^! 민호샘 말처럼 그들의 저작과 니체가 어떻게 만날지 니체팀 모두와 ‘함께’ 기대해 보아요~~

  • 2021-08-04 23:29
    글이 참으로 담담해진 듯합니다. 민호샘의 후기를 읽고 있으니 채운샘의 강의가 다시 청량하게 들리는 느낌이네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