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2주차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0-06-02 10:15
조회
116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도 규문은 자체 안전 시스템을 가동했습니다. 오시는 샘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민호샘은 꼼꼼히 열을 체크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공부하는 우리, 열기만큼은 식지 않았습니다.

비기너스 두 번째 시간 후기입니다. 늦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주는 푸코의 1981~1982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를 채록한 <주체의 해석학>중 일부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건화샘은 매번 푸코를 읽으면서도 읽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푸코를 읽다 보면 푸코가 분석하는 내용에 빠지게 되는데, 신자유주의 분석을 하면 신자유주의자에 대해 알게 되고 플라톤을 다루면 플라톤에 대해 알게 되긴 하는데, 푸코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그걸 통해 어떤 질문을 제기하는지보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정도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에 공감합니다. 읽을 때는 겨우겨우 이런 내용이구나, 하며 읽는데 읽고 나면 다시 미궁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죠. 하여튼 중세를 다루고 고대를 다룰 때조차도 푸코는 현재적 관심의 자장 속에서 그 역사를 다루지 역사 그 자체를 알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죠. 역사를 공부해도 역사 자체에 무슨 일이 있었냐보다도 그걸 통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근대적인 진실 이해 방식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푸코는 근대 철학에서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영성’이라고 했습니다. 푸코는 철학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이라 하죠. 그 때 “영성이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가리킨다”(58쪽)고 합니다. 이런 영성이 근대 철학에서 소거됐다는 거죠. 그래서 푸코는 “서양에서 실천의 소관도 아니고 익숙한 역사 분석의 소관도 아닌 ‘주체’와 ‘진실’의 관계들이 어떤 형태의 역사 내에서 서로 관계 맞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게 이 강의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건화샘은 진실, 주체 이 관계가 아직도 선명히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이 문제 하나만 제대로 잡고 가도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에 대해 저도 고민을 했습니다. 진실, 주체.. 주체가 뭘까요? 한마디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입니다. 실존이죠. 지난 시즌 때 우리가 공부했던 ‘진실체계’라는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주체는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때 자기만의 참, 거짓의 진실체계에 따라 행위를 구성합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취하는 방식,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그 영역을 인식의 영역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진리를 알면 주체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죠. 푸코도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않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는 이런 태도가 낯선 것이었다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기원전5 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있어 ‘자기인식’은 ‘자기배려’의 한 부분이었다는 겁니다. “자기 배려”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자칫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채운샘의 인트로 강의 때 함께 읽은 보조 자료 푸코와의 대담에서 푸코는 “어떤 시점 이후(그 시점을 푸코는 ‘데카르트의 순간’이라 지칭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자기배려가 일종의 자기애, 이기주의, 또는 타자에 대한 배려나 필연적인 자기희생과 모순되는 개인적 이해로 점차 평가절하 되었다”고 합니다.

샘들은 책 전반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 ‘데카르트적 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델포이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가 근대에 와서 자기 인식의 문제로 축소됐다고 했습니다. 건화샘은 고대에는 자기 변형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자기 배려가 자연스러웠고 자기 인식은 그런 실천의 총체 속에서 하나의 조건이었는데, ‘데카르트적 순간’ 이후 자기 인식만이 진리 추구를 위한 선행 조건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진리로 가기 위한 통로,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에게 가한 고행과 수련이 인식에서 제거되어버렸다는 거죠. 즉 원래 철학과 영성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분리됐다는 말씀이죠. 그러면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작업이랑 주체가 무관하게 됐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상인이냐, 교육을 받았느냐, 과학적 합의에 도달했는가..(62쪽) 진실에 접근한다는 문제가 주체가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이란 문제를 확증받을 수 있는 외부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의 문제, 적법한 절차를 따르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됐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도 엄정한 방법을 따르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자기 변형의 실천과는 무관하게 진리는 대상으로 따로 있고 인식하는 주체는 고정된 채로 따로 있어서 그 다리를 이어주는 외부적 조건 객관성 적법한 절차를 담보받기만 하면 되는 걸로 바뀌었다, 푸코가 말하는 ‘데카르트적 순간’이란 이런 뜻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리는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63쪽)라는 문장의 의미를 진실에 접근하는데 있어 그 보상이 존재 자체가 누리는 역량의 증가가 아니게 됐고 인식의 무한한 여정만이 남게 돤 상황이라 해석하셨다고 했죠.

수정샘은 그 문장을 “데카르트 이후가 되면 내 윤리는 없고 학교에서 정해준 윤리, 사회에서 정해준 윤리, 그런 윤리를 알기만 하면 난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는 나만 있다. 그러니 주체가 따로 있고 그 진실이 따로 있어 알기만 하면 할 수 있다. 주체와 진실이 분리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난 항상 진실이 무엇일까, 외부의 진실만 쫒게 된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윤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카테고리만 늘 뿐이지 자기윤리로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이해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안다는 것”이 뭔가를 다시 돌이켜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알기는 아는데 실천이 안 된다는 말을 씁니다. 그런 생각은 상식이죠. 그런 우리의 상식 속에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입증되는 앎들이 따로 있고 적용되는 것으로서의 윤리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적인 사유 속에서는 안다는 문제에 접근함에 있어 몸으로 체현하고 있지 않는 앎은 앎이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이었습니다.

현숙쌤은 주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안 되는데, 그럼에도 ‘진실이 주체를 구원할 수 없다’ 같은 문구에서 거듭 주체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건화샘은 '탈주체철학'이라는 의미는 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주체와 진실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주체를 이야기한다는 뜻이라고 파악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이 질문에 생각을 보태자면, ‘푸코와의 대담’에서도 푸코는 시종 자기가 천착했던 문제는 ‘주체’였다고 하면서 “주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현상학이나 실존주의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하나의 주체이론을 먼저 세우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체의 구성 또는 주체의 상이한 형식들과, 진리놀이들, 권력의 실천 등의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주체에 대한 특정한 선험적 이론을 거부”했던 것이라고요.

건화샘은 ‘데카르트적 순간’을 일리치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고 하는데요. 주체와 진실, 그 관계의 분리를 푸코가 말할 때 자기 변형을 통한  진실접근, 영성이 제거되는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일리치식으로 말하면 ‘아파르트헤이트’, ‘추상화’라는 개념과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라고 하셨습니다. 일리치가 이야기하는 추상화, 아파르트헤이트는 살아감이 생존이라는 말로 추상화되고, 동사적인 ‘배운다’라는 의미가 교육이라는 제도로 추상화되며, 실제로 관계하고 공동체에서 마주하는 타자로서의 하나의 인격체가 수를 셀 수 있는 추상화된 생명이라는 말로 이야기될 때, 그때부터 삶은 자원화할 수 있고 그 사람의 필요를 수량화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구제조차도 수량화된 물질로 계산한다는 거죠. 좀 더 정밀하게 논하려면 몇 가지 징검다리가 필요하긴 한데, 인식이 인식의 대상과 분리되게 되었다는 ‘데카르트적 순간’과 이 부분이 연결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그 인식대상을 체화하고 있고 그것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인식이 규정되었는데 이제부터는 주체가 맺고 있는 관계와 무관하게 객관적인 사실의 세계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수정샘은 “신체를 배려를 하는 것과 자기 배려를 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 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배려는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규율을 동반한다, 즉 불교식으로 말하면 수행에는 계율이 동반된다는 부분과 관련해 “사실 주체인 영혼을 목표로 하는 순간부터 자기 배려는 적어도 외관상 자기 배려로 간주될 수 있는 세 유형의 활동들-의사, 가장, 연인-과 아주 명확히 구분됩니다.”(98쪽)는 문장에 주목했고, 일리치와 어떻게 연결될까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의사의 양생술을 ‘병원이 병을 만든다’, 가장의 가정관리술을 ‘그림자 노동’...이렇게 연결시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푸코는 이 부분에서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환자를 치료하는 게 자기 배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라고 하면서, 그것은 자기 배려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 그것은 신체를 다루는 것이지 영혼을 배려하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 대목을 일리치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와 연결시켜 보면, 나의 모종의 아픔은 병원에서 내려주는 병명에 따라 병이 되기도 하고 아니게 된다면서 현대인은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 전문가인 의사가 내 몸의 주인처럼 되는 걸 당연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의 치료법, 즉 양생술은 자기배려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건화샘은 덧붙여 이 부분은 자기배려 일반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플라톤적 의미에서 자기 배려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플라톤적 입장에서는 자기배려와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분리시켰지만, 로마로 와서 에피쿠로스학파는 가정관리술과 자기배려를 분리시키기도 했고, 스토아주의는 연결시키기도 했죠. 플라톤이 양생술과 자기배려를 분리시키기는 하지만 다른 맥락 속에서도 그리스시대에 로마의 황금기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배려는 특권적인 지위, 엘리트만의 특권이었던 같다고 합니다. 푸코는 자기배려가 양생술과 연관된다고 하지만 양생술 자체가 자기배려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죠. 그처럼 일리치가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도 ‘건강이 하나의 과제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의사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서비스와는 조금 다른 양생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게 자기 배려로서의 양생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자기인식과 함께 가는 양생술, 자기 몸과 자기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이해하는 가운데 내 신체를 돌보는 것, 의사는 단지 내 몸을 대상으로 낫게 하는 것은 양생술일 수는 있지만 자기배려의 양생술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밖에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토론시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이번 시즌이 지난 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반장 건화샘이 자상하게 요약정리를 해오셔서 간단한 미니 강의를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힘이 드셨을 겁니다. 덕분에 우리는 공부를 좀 더 수월하게, 그러나 좀 더 세심하게 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거죠.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주체의 해석학>이 그동안 읽은 푸코의 다른 책보다 흥미로웠고 이해도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만 앞의 공부와 총체적으로 연결해 곱씹어봐야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든 공부할 수 있는 여건 속에 있다는 것이 이미 공부가 되고 있다는 뜻이라 여기며, 우리 샘들 파이팅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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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2 10:30
    “진리는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63쪽)고 표현되는 데카르트의 순간의 전 후에 있어서 진실이라는 것이 이해되는 방식, 즉 진실과 그 진실의 주체라는 문제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변형 없이 진실이 있을 수 있는지, 주체의 문제, 일리치와의 비교 등등이렇게 풍성한 논의가 오갔다니, 재미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