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세 번째 시간(6.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5-28 21:36
조회
80
이번 주에는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1월 6일 강의와 13일 강의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토론 도중에 나온 얘기를 조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데카르트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코기토’ 개념을 창안함으로써 인식 주체를 그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고정시키고, 주체에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 데카르트를, 푸코는 주체-진실의 관계에 있어서 고대와 근대를 분할하는 상징적 표지로서 호출합니다. 물론 데카르트 개인의 사상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거나,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모든 변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데카르트라는 상징을 통해 푸코는 인식 상의 어떤 불연속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겠죠.

말한 것처럼, 데카르트의 순간을 푸코는 진실-주체 관계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진실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모습을 감추게 되는 것은 바로 ‘영성’입니다. 고대 세계 전반에 걸쳐 주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성’의 차원을 경유해야 했습니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현재의 자기 자신과 다르게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철학적 명제를 안다는 것(그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은 자기 형성적 실천 속에서 그러한 명제를 살아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죠. 영성은 바로 주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주체-진실의 관계에서 ‘영성’이 배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주체의 존재와 인식 사이에 어떤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앎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체화하기 위한 수행의 차원과 무관하게 주체의 존재 바깥에 객관적 인식의 차원이 따로 존재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 윤리의 문제는 앎의 적용이라는 차원에 국한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유명한 말이 기억납니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유를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삶, 삶을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사유”(들뢰즈)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식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 혹은 삶에 의해 한계 지어지는 인식이 있을 뿐이죠.

우리는 이것을 도덕과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어보았습니다. 난희샘이 재판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대중에 영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이런 질문을 던져주셨죠. 철학자이자 정치인(?)으로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자기 배려를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여론과의 충돌을 무릅썼는데,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은 무엇을 자신의 윤리로 삼고 있으며 우리가 그들에게 요청하는 도덕성이란 또 무엇인가? 저는 이것이 주체-진실의 관계와 연관되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도덕에 빠져있는 것 또한 자기 형성적 실천이 아닌가 합니다.

푸코는 근대에 이르러 ‘자기 배려’라는 고대적 개념을 토대로 발전된 엄격한 모럴이 ‘자기 포기’ 혹은 ‘타인에 대한 의무’라는 새로운 바탕 위에 재구축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자기 포기’와 ‘타인에 대한 의무’입니다. 얼마 전 조국과 최근의 윤미향 논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정성, 희생정신, 청렴함 등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잣대로 정치인들을 심판할 때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선택과 발언과 삶의 방식 속에서 드러나는, 그가 자기 실존을 형성하는 고유한 스타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외부적 척도와의 관계 속에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이고 정직하거나 그렇지 못한 그의 ‘의도’를 문제 삼죠.

우리의 도덕성은 스스로의 실존을 조형하는 실천들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로서 우리가 도덕규범과 맺는 관계 속에서 구성됩니다. 저는 도덕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도중 예전에 읽었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떠올랐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도덕을 만들어가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때 안토니우스의 방탕함은 베풂에 있어서 관대한 그의 탁월함이 되고, 카이사르의 야심은 그의 비참한 죽음까지 포함하여 그의 환원불가능한 실존을 이루는 그 자신의 도덕이 됩니다. 우리는 ‘도덕’에 민감합니다. 도덕성에 흠집이 난 정치인들, 부주의로 바이러스를 퍼트린 몇몇 확진자들, 도덕규범을 깬 범죄자들을 가혹하게 심판하죠. 그런데 이때의 ‘도덕’이란 어떤 도덕일까요? 그것은 어떠한 조건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주에는 1월 20일 강의와 27일 강의를 읽고 오시면 됩니다(~200쪽). 과제는 지난번처럼 메모를 해 오시는 것입니다. 책 내용을 정리하신 메모는 따로 갖고 계시고, 핵심적이라고 생각하시거나 질문이 생기시거나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몇몇 구절들과 그 구절들에 대한 코멘트를 인원 수 만큼 (20부) 프린트해오시면 되겠습니다~ 간식은 지영샘과 경혜샘께서 맡아주셨어요~
전체 2

  • 2020-05-28 22:28
    저의 질문을 찰떡같이 정리해주셨네요. 소크라테스의 헌신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당히 '좋은 보상'을 요구했던 소크라테스, '좋은 보상'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이 줄 수 있는 흔한 무엇은 아닌 듯 합니다.
    제가 느끼기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자기배려를 자기버전으로 계승한 것이 바로 그 '좋은 보상' 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2020-05-29 14:33
    니체도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덕적 가치 표시가 어디에서나 먼저 인간에게 붙여지고 그리고 비로소 파생되어서 후에 행위에 붙여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이 분리되지 않은 도덕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외부의 도덕적 척도에 빗대어 선하냐 악하냐가 문제가 되는 지금이 바로 스스로의 실존으로 자기 진실의 주인이 되었던 자들의 영성이 사라진 시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