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3 두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0-10-26 20:56
조회
156
“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샘이 언급하신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을 검색하니 주제처럼 언급되는 격언이 이 문장이더군요. 코엔 형제의 다른 작품들은 보았지만 이 영화는 본 적이 없지만, 한~ 시리어스 하는 일인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단순성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삶이 우리의 기대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 의도대로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수학적으로 불확정성의 원리를 쌈박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문제조차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닥치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고 아울러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요, 수용할 수 없기에 너무 억울합니다. 내 목적대로 안 되는 세상, 억울한 일 투성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은 그래서 무슨 뜻일까요? 단순성, 유머러스하게, 가볍게, 진지하고 심각한 것은 No No, 무심하게,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어떤 것도 확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없음을 그리하여 모든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음을, 단순함이 단순해지지 않습니다.^^

샘은 우리에게 도대체 앎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서 강의를 시작하셨는데요. 불교에서는 앎조차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이라고 얘기합니다. 중관학파에 가면 공마저도 공하다로 이어지구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사실 앎이라는 것을 의지처로 삼거나 도그마 화하는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저로서는 깨달음의 내용 자체도 도그마 화하지 않으시는 부처님을 쉽사리 범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철학자들은 부처님과 같이 깨어있는 자들입니다. 어딘가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의미의 깨어있는 그들은 끊임없이 이행하는 자들이기에 자신의 앎을 도그마 화하거나 절대시하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자기가 붙잡은 것을 계속 머물러 있는 것처럼 만드는 짓을 반복하는 우리는 잠들어 있는 무명의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깜깜한 어둠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두렵고 답답합니다. 그러니 이 무명이 무지이자 우리의 苦이겠지요.

예전에 십이연기법을 처음 접하고서는 그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에 감탄하면서 그 전까지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불교의 이론들이 좀 더 명료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었는데요, 번뇌에서 고로 인과관계를 도식화한 십이연기는 번뇌라는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우리가 실제적으로 겪는 모든 작용을 촘촘하게 나눠서 설명해줌으로써 우리가 왜 편안하지 못하고 번뇌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①無明-②行-③識-④名色-⑤六處-⑥觸-⑦受-⑧愛-⑨取-⑩有-⑪生-⑫老死, 불교의 입장에서는 혼돈 그 자체 깜깜한 우리의 삶이 無明입니다. 실체가 없는데도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 샘은 질문 없는 삶이 무명이라고 하셨는데요. 사실 문제 없는 삶이 없을 텐데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질문으로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삶에 문제가 없을 수 없는데도 왜 우리는 질문하기가 어려울까요? 아직도 질문 하나를 구체화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저로서는 그 근거를 여기다 꿰어 맞추어 봅니다.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라고요.^^ 이런 무지로부터 만들어진 의지작용이 行이고 이 행으로부터 만들어내는 무지에 의한 의식작용이 識입니다. 행과 식을 통해서 사물이 있는 것처럼 부여하는 이름과 색 名色이 부여되면 우리는 그 이름과 색대로 사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저렇게 존재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감각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감각기관을 실체화하게 됩니다. 그것이 六處, 眼耳鼻舌身意을 통해 세상과 觸, 접촉을 하고 受, 마음이 일어나고 방향성이 발생하고 그것을 통해서 쾌/불쾌, 애정하는 것이 생겨나고 愛, 따라서 좋은 것을 유지하고 싶은 取, 취하고 싶은 것이 영원히 그렇게 있다 라고 하는 실체를 견고화하게 만드는 有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게 되고 生과 老死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 有가 윤회생존의 주체가 되겠지요. 샘은 십이연기가 윤회라고 하셨는데요, 윤회는 이런 식의 의식과 감각에 대한 전체적인 작용의 한 고리라고요. 저는 전에 마음의 반복이 윤회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요, 하나의 변용방식만을 고집하는 것, 하나의 해석만을 가지고 자신을 규정성 안에 가두는 것, 습관적 인식패턴과 마음의 회로가 윤회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업의 반복, 업이란 어떤 흔적을 남기는 의도 같은 것으로서 인간 의식, 마음의 출현과 연관되어 있는데요, 업을 좀 독특한 인과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하시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면서도 좀 더 독특한 방식의 인과가 작동하는 것이 업이라고요. 업을 바꾼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기존에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반복해서 번뇌를 재생산해내고 세상에 대한 습관적인 인식과 느낌의 방식을 산출해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인 인식 물론 내가 있다는 생각은 인류 전체의 무의식, 무시 이래의 업이지만, 십이연기법의 인과관계를 통해 내가 있다는 생각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사유하는 훈련을 거듭하다보면 확연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순차적인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또 역순으로 따져보고 하면서 숙고해보면 참 과학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상체험처럼 어떤 생각도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마음을 기존의 방향과는 반대로 습관화하는 훈련을 하는 것, 그것이 번뇌와 고를 만들어내는 업의 방향성을 바꾸는 시도가 될 것 같습니다.

십이연기법뿐만 아니라 불교는 어마어마한 논리학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요. 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조차 도그마 화하지 않으셨고 법을 설파하실 때도 사람들마다 그들의 근기와 기질에 따라서 설법을 하셨기에 사실 다양한 부처님 말씀이 존재하고 그것이 서로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논과 경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결국에 불교의 사상은 공과 무아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 강조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샘은 불교 법맥의 계보를 대략적으로 정리해주셨는데요, 說一切有部(현상 자체는 공하고 무자성이지만 그렇게 현상이 나타나게 만드는 기초 요소와 같은 것은 있음을 72법으로 분석) 그것을 기초로 해서 논으로 만들어진 아비달마론 그것을 세친이 종합한 아비달마구사론(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해체적인 관점에서 분석), 세친과 그의 형 무착이 성립시킨 유식론(모든 것은 마음작용의 산물일 뿐임을 분석) 그리고 중관론(양단을 다 쳐내고 논리적으로 모순을 격파, 일체의 공성, 공을 상호의존적 발생으로 정의), 이 중관사상이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로 나뉘고 찬드라끼르띠, 샨띠데바, 쫑카파 대사 그리고 달라이라마까지 법맥은 전승됩니다. 티벳에서는 제가 듣기로는 중관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구사론, 인명학, 유식학 등을 먼저 익히며 20년 정도의 시간 동안 공부를 한다고 들었는데요, 그 학문의 방대함과 깊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一切皆苦, 저는 요즘도 가끔씩 인생이 苦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생각할 때가 있는데요. 인생이 원래 고통스러워 이런 말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부여잡고 있는 한에서는 결코 편안할 수가 없다는 의미라고 샘은 말씀하셨는데요. 앞의 영화의 주인공이나 저처럼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체화하고 버리지 못하는 한 고통은 제거될 수가 없겠지요. 사실 여기서 고통이 비롯되는 것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찬물의 비유가 쉽게 와 닿았는데요. 원래 찬물 뜨거운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그 물은 차갑게도 뜨겁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지요. 차가운 물 뜨거운 물이 항상 그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체화하는 사고방식일 것입니다. 차가운 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차가운 물은 항상 차가운 물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편치 않아집니다. 마음에 안들고요. 물론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도 우리에겐 고통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사라질까 애타는 마음도 고통이니까요. 불교에서는 고통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는데요. 苦苦(원래 고통이라고 느끼는 고), 壞苦(변하는 데서 오는 고통), 行苦(무엇이 실체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수반되는 고통)가 그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왜 우리는 자꾸만 감각과 의식이 관습에 만들어낸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일까요? 불교가 문제 삼는 것은 이 정체성을 부여하는 관습적 삶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즉 고통을 어떻게 자각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좋은 것 나쁜 것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는 무수한 인연조건 속에서 그렇게 해석된 것일 뿐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습관적 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처음으로 굴리신 법의 바퀴인 초전법륜의 내용은 사성제입니다. 고집멸도, 우리의 출발점은 자신의 고통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고통스럽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사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제거해야 할 무엇으로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조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이해와 행을 쌓아나간다면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었던 불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혁명적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카스트제도 속의 인도 사회에서 나왔다는 것이 참으로 전복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처럼 ‘그대 스스로 그대의 지도자가 되라’, 구원은 자기 스스로밖에 할 수 없음을 여러모로 시리어스하지 않은 방식으로^^ 숙고해봐야겠습니다.
전체 3

  • 2020-10-28 17:19
    호오 시리어스하지 않게, 단순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인다는 건 뭘까요? 니체는 우리가 보는 법, 즉 보이는-대로-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왠지 그 말이 떠오르네요. 샘 말씀대로, 우리는 정말로 너무나 시리어스하게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변용방식만을 고집하는 것, 하나의 해석만을 가지고 자신을 규정성 안에 가두는 것, 습관적 인식패턴"을 가지고서, 온갖 선판단과 개념과 언어와 이미지를 덧붙여서 말이죠. 다른 게 아니라 정상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상태 자체가 병임을 자각하는 것이 사성제의 출발점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구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0-10-28 17:28
    샘이 강의를 이렇게 촘촘하게 알아듣기 쉽게 풀어놓다니 역시~~ 너무 수고했어요
    덕분에 다시 생생한 강의를 반복해서 듣는것 같았어요^~^

  • 2020-10-29 21:21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물의 온도가 다를 수 있다는 비유가 정말 콕 와 닿습니다. 찬물이란 실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조건 속에서만 그렇다는 거슬.....! 잘 새겨봐야 겠슴다.
    자세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정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