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3 첫 시간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0-21 00:19
조회
105
‘불교 of 티베트’ 시즌 3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에는 달라이라마께서 불교 논장(論藏) 의 왕(王)이라고 극찬하신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을 공부해 보기로 했습니다. 논(論)이라고 하지만 짧은 게송의 형식을 띄고 있어서 저희는 매 시간 조금씩 낭송을 해가며 <입보리행론> 전체를 함께 완독하고, 그 중에서도 자비와 지혜를 다룬 6장 인욕품과 9장 지혜품의 내용을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해설서로 읽기로 했습니다.

낭송을 하며 읽어본 <입보리행론>은 언뜻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고 읽다보면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논서에 대한 주석서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으로도 짐작을 해볼 수 있겠죠. 티베트에서는 초심자들이라면 누구나 <입보리행론>을 외운다고 합니다. 티베트어 번역이 워낙 아름다운데다가 음률이 완벽하게 맞춰진 4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얘기를 들으신 차원샘께서 티베트어로 낭송하는 입보리행론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해서 이번 시즌 마지막 시간엔 저희끼리 티베트어로 한 게송만 낭송을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ㅎㅎ

인욕?! 자비와 지혜의 힘으로

이번 시즌 저희가 토론하는 첫번째 텍스트인 <달라이라마, 화를 말하다>는 지난 시즌 저희가 본 달라이라마의 영상 법문 속에서 통역을 해서 이제 저희에게도 낯설지 않은 툽텐 진파님이 편역을 했습니다. 이 분은 책의 서문에서 다음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산속 동굴에서 홀로 살던 은둔 수행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양치기가 그 동굴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은둔 수행자를 본 양치기가 호기심에 묻습니다. 혼자 거기서 뭘 하느냐고. 수행자는 자신이 인내에 대한 명상을 하고 있다고 답합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양치기는 돌아서 가려는데 갑자기 수행자를 보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뭐라고? 너나 지옥에나 떨어져라!” 하고 수행자가 맞받아쳤습니다.
그러자 양치기는 웃으며 수행자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일깨워줍니다. (「달라이라마, 화를 말하다」, 10-11쪽)

우리는 일상에서 늘 화를 터뜨리게 되는 상황과 마주칩니다. 이 화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 매 번 화가 자초하는 괴로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상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는 하지만 정신의 도야(!)를 원하는 자라면 그런 예측가능한 반응을 넘어서야 한다고 툽텐 진파는 말합니다. 바로 이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입보리행론>의 ‘인욕품’이고요.

화라는 거친 감정에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이 인욕이라는데 그렇다면 이 인욕이란 어떤 것일까요? 인욕이라고 하면 감정을 억누르거나 참아내는 부정적인 상태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샨티데바가 말하는 인욕 또는 인내란 그런 수동적인 굴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외적, 내적인 동요에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러한 능동적 대응의 바탕에는 나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각과 공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누구나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지만 이것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 뿐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점 말이죠. 이 공감이 화에 대응하는 인욕의 바탕 가운데 핵심이 되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킵니다.

저희가 진지하게 토론을 했던 부분은 인욕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지점, 즉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일으키는 행동과 사건 그리고 감정이 수 많은 조건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프고 싶지 않아도 아플 때가 있죠. 이 때 내 몸을 아프게 하는 조건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 역시 그의 행동을 그렇게 조장한 숱한 조건들이 그 사람의 의지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싶지 않지만 어떤 상황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화를 내듯이 말입니다. 샨티데바는 화라는 감정의 실체는 우리 안에 내재한 견고한 무엇이 아니라 다수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화는 화를 내는 그 사람의 결연한 의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다수의 원인과 조건 속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인연 조건을 통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닐 때 화라는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욕을 수행하는 것은 이야기 속의 은둔 수행자처럼 다른 사람과 동떨어져 닦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툽텐 진빠는 전혀 도전받지 않고 은둔하는 삶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인내와 자비를 즐겁게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타인과 마주치는 현실에서 인내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12쪽)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날마다 잊지않고 내게 마음의 번뇌를 안겨주는 가족, 친구, 이웃, 상사, 동료...들이 실은 나의 인욕과 인내를 공부하게 하는 스승이 되는 이유겠죠.


화를 내는 것은 오직 해로울 뿐
!

일천 겁 동안 쌓아올린 보시와 / 붓다에게 올린 공양등의
어떤 선행이라 하더라도 / 단 한 번의 화로 모두 무너질 수 있다. (「입보리행론」 인욕품 1)

샨티데바는 화, 증오야 말로 보리심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라고 말합니다. 모든 공덕을 와르르 무너뜨린다고요. 그러니 이 화를 근원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선 잠깐...! 화, 증오의 감정을 달라이라마께선 ‘분노’와 구분해서 설명을 하셨죠. 화나 증오는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번뇌이지만, 분노는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가령 자비를 동기로 분노가 일어날 수도 있고 긍정적 행동을 일으키는 촉매제로써 분노가 작동할 수도 있다고요. 이런 것을 일컬어 ‘청정한 분노’라고 해야할까요? ^^

달라이라마는 우리가 화를 일으키는 직접적 이유는  마음의 불편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의 잘못이 나의 화를 일으켰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람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화낼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만일 내가 그 상황을 전혀 다른 조건에서 겪었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즉 화가 나는 이유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고 분별하는 나의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되지 않을 때, 뭔가가 성가시고 불만족스러울 때, 그냥 이런 저런 사소한 불편함 등등... 이 모든 것이 화의 연료가 되는 것이죠.

샨티데바는 이미 화가 난 상태에서 그 화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화를 일으킨 불만-화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화의 원인이 되는 잠재적 불만족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예요. 강의 흐름을 멈추고자 할 때 강의 지류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 원류로 올라가 물길을 바꾸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화와 증오를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들을 관찰하고 탐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의 기저에 있는 원인을 없애는 접근법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될 때 일어나는
마음의 불쾌함을 먹이로 삼아/ 화가 커져서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니 나는 이놈의 먹잇감을 / 모조리 찾아 없애야만 한다.
이처럼 이 화라는 적이 내게 저지르는 / 일이라고는 해를 입히는 것 말고는 없다.  (「입보리행론」, 인욕품 7-8)

화를 내지 않고 화에 대응하겠다는 인욕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선 먼저 화라는 내면의 적이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짜증이든 화든 증오든 이 감정은 화를 내는 자신에게도 화의 대상인 상대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괴로움과 해만 끼칠 뿐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대체 왜 화를 내고야 마는 걸까요?! 우리는 화가 해롭다는 이 단순 명백한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샨티데바는 거친 땅 위를 걷는데 발바닥이 아프다고 땅을 다 덮을 가죽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단지 내 두 발만 가죽으로 감싸면 될 것을 말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어찌 해 볼 도리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공지 사항**

이번 시간에 함께 연습한 호흡 명상을 꾸준히 집에서 연습해보시고 3주차에 다시 사마타 명상을 함께 해보겠습니다.

10월 25일, 2회 불티 세미나에는 채운샘의 강의가 있습니다.  10시에 모여서 <입보리행론> 3품과 4품을 낭송하고 잠시 휴식 후, 10시 30분부터 2시간 가량 강의를 듣겠습니다. 2주차에는 토론이 없으므로 책은 <입보리행론>만 챙겨오시면 됩니다.  (참고로 세미나 3주차에는 <달라이라마, 화를 말하다> 150쪽-275쪽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강의 후에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입보리행론> 법문을 시청하고 마칠 예정입니다. ^^

다음 주 간식과 후기는 현정샘께서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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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1 08:48
    세미나 때 차원샘의 질문대로 저희에게는 특정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분노는 상대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일정 부분을 마비시키면서까지 그래야겠느냐하면, 아닌 것 같습니다. 튼튼한 가죽신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