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일곱번째 시간(4.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3-30 10:49
조회
84
지난 시간 강의에서 채운샘은 ‘주체’의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푸코는 주체가 생산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어쩌면 억압의 가설을 그토록 격렬하게 비판해야 했던 것도 주체의 생산을 문제 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우리가 성이 억압되었다고 말할 때, 여성의 쾌락이 배제된다거나 동성애가 금기시된다고 말할 때, 누군가를 ‘여성’으로 또 ‘동성애자’로 생산하는 조건은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집니다. 쾌락은 자연스런 본능과 동일시되고 권력은 부정적인 기능으로 축소되어 보이죠. 이때 우리는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실체적 폭력들만을 ‘권력’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라는 것은 그다지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쾌락을 느끼고 일상을 구성하도록 하는 원인들은 ‘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가 아닌 것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로 되어갑니다. 지식과 도구와 제도와 관습과 다른 인간들과 동물들과 공간과 맺는 관계들을 빼놓고 ‘나’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나’로 만드는 관계들, 푸코에게는 이것이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주체는 권력이 관통하고 또 굴절되는 하나의 거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에 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들과 다르게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 또한 매우 정치적인 일이 아닐까 합니다. ‘주체화의 과정’을 문제 삼을 때 주체의 변형이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동시에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것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자기 자신을 변형한다’는 것과 무관해졌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 공부하는 사람이고, 아이를 낳으면 부모이고, 어떤 기술을 가지고 먹고살면 기술자인 것일까요? 우리에겐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을 특정한 방식으로 굴절시키고 변형한다는 의미에서의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문제설정,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는 문제설정이 부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건, 어떤 활동 속에서 삶을 영위하건 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쾌락과, 신체와, 정서와 관계하는 방식에서 너무나 노멀합니다. 노멀하다는 것은 잘 길들여졌다는 뜻이고, 잘 길들여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문제들을 겪어낼 수 있는 기술과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고, 그러한 기술과 역량의 부재는 우리를 ‘소비자’라는 유일한 존재방식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노멀한 근대인들답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윤리를 어떻게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창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가 아니라 ‘공공질서의 유지’라는 문제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마디로 술(ars)의 부재. 앞으로 푸코를 읽으며 이러한 기예의 부재라는 문제의식을 어떻게 첨예화해볼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이제 《성의 역사》 1권이 두 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시간에는 5장의 두 번째 칼표시(‡) 전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숙제방에 올려주시고요. 그럼 곧 뵙겠습니다~~
전체 2

  • 2021-03-30 11:27
    쌤의 강의를 길 걸으며 다시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푸코가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시종 자신의 문제의식은 '주체'였다고 했다. 즉 자기자신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 그게 바로 주체를 생산한다는 의민데, 도대체 우리는 그 자기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한없이 어려운 이 말 "자기자신"이 개념이 아니라 뜨거운 뉘앙스로 제 귀에 꽂히는 겁니다. 푸코의 난바다와 같은 문장들의 바다에서, 쌤이 가리키시는 손가락 끝에서 제가 보고 느낀 이 뜨거움ᆢ건화쌤의 후기에서도 그걸 확인합니다.
    아르스는 아르스를 부르죠.

    • 2021-03-31 12:03
      크으... 어떤 말이 개념이 아니라 힘으로 다가올 때가 있죠. 그 뜨거움에는 샘의 넘치는 지적 감응능력(?)도 작동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주 세미나도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