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여섯 번째 시간( 3.26)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3-22 09:07
조회
68
“내가 생각하기에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령 ‘성애술(erotic art)’이라는 말로 전달될 때의 의미에서 ‘술(術, art)’로 읽는 것이다. 다양체, 흐름, 배치체, 연결 등 표면상 추상적인 개념들에 의거하고 있기는 하나, 욕망과 현실의 관계, 욕망과 자본주의 ‘기계’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구체적 물음들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다. 왜 이것 아니면 저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와 더 관련된 물음들 말이다. 사고에, 담론에, 행동에 어떻게 욕망을 도입할까? 욕망은 어떻게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힘들을 펼칠 수 있으며 또 펼쳐야 할까? 그리고 욕망은 어떻게 기성 질서의 전복 과정에서 더 강렬해질 수 있으며 또 강화되어야 할까? 성애술, 이론술, 정치술(ars erotica, ars theoretica, ars politica).”(미셸 푸코, 『안티 오이디푸스』 미국판 서문)

지난 시간 강의 때 채운샘이 언급하셨던 푸코의 『안티 오이디푸스』 서문입니다. 저는 예전에 이 서문을 읽고 ‘와 멋있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성의 역사』를 읽으면서 다시 보니 또 새로운 맥락이 보이네요.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술(術, art)’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마치 정신분석에 맞서서 ‘욕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새롭고 더욱 참된 답을 내놓는 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푸코가 보기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나 ‘성’이라는 대상을 논하는 ‘학문(science)’을 한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욕망을 작동시키고, 분기하게 하고, 기존의 질서를 넘어가도록 하는 ‘성애술’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푸코에게 왜 중요했을까요? 그건 푸코가 ‘앎’과 ‘권력’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푸코는 광기, 범죄성, 성생활 등이 학문의 대상으로서 출현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해왔습니다. 단순히 위법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을 앎의 대상으로 출현시키는 권력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학문의 출현은 어떤 권력관계를 작동시키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 푸코는 ‘아르스(ars)’의 상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근대, 비서구인들에게 앎이란 일종의 기예였습니다. 그들에게 앎이란 자기 자신과 더욱 능동적으로 관계하도록 하는 수단이자 기술이었습니다. 성에 관한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과의 관계에서 더욱 능동적으로 되는 것, 평정을 얻는 것, 쾌락을 매개로 더 높은 차원의 통찰로 나아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앎이 곧바로 실천의 기예가 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기 진실의 주체’가 아니었을까요.

『성의 역사』 세미나를 하면서 저는 ‘윤리’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를 통해서 윤리를 말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 윤리가 기예로 이해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윤리-기예’에 대해 고민한 또 한 사람은 바로 일리치입니다. 일리치는 전문가들이 생산하는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담론들에 대해서 대항적인 앎들을 구성해냄으로써 ‘절제’나 ‘금욕’과 같은 윤리적 개념들을 매우 정치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문제는 불공정한 분배나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우발적인 외부효과들이 아니라, 도구와 기술과 제도와 공간과 자기 자신의 신체와 관계하는 실천적 윤리-기예의 결여라는 것을 보도록 해줍니다. 제가 푸코와 일리치를 함께 읽으며 막연히 느낀 공통점이 이런 교차하고 겹쳐지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주에는 <성의 역사> 4장을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까먹고 안 정했군요. 카톡으로 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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