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12.8 니나노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8-12-14 20:05
조회
68
지난 주, 안고의 <청춘론> 번역을 드디어 한 번 완주 했습니다!! 초벌 번역 해주신 이한정샘과 한 문장·한 글자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꼼꼼히 보며 수정하신 선생님들 덕분에 카타카나를 막 땐 저도 어찌저찌 따라올 수 있었어요.

샘들이 주신 안고의 원문과 번역본 사이를 오가며 주워들은 내용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정석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무사시의 검법의 경지를 청춘에 빗댄 대목이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전부를 거는 무사시와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전부라는 안고의 삶에 대한 태도가, 대게는 주저주저하다 마는 저와 대비되어 인상적이었습니다.

“덴시치로와의 시합에서는 상대가 커다란 목도를 지참해서 놀랐을 때에 역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맨손으로 근접해가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고지로와의 시합에서는 상대가 칼집을 던져버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며, 마쓰다이라 이즈모노카미의 어전 시합에서는 상대의 방심을 눈여겨보다가 인사하기 전에 상대를 쓰러뜨렸다.(<청춘론>번역문 중. 이하 생략)”

<청춘론>에서 안고는 무사시의 이런 검법을 ‘청춘의 검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이름난 초식이나 정석을 따른 검술이 아니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사시의 ‘개성’이라는 것이 좀 묘합니다. 약속 시간에 일부러 늦게 가서 상대를 초조하게 한다든지, 반대로 앞서서 가기도 하며 상대의 심리의 약한 면을 이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약점마저 역으로 무기로 이용합니다.

애들 장난 같은 이게 무슨 검법인가 싶지만, 안고는 바로 이것이 ‘진짜 검법’이라고 말합니다. 시합에서 지면 자기가 죽고 마는 속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인데요, 안고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무슨 짓을 해도 이기면 그만인가 싶지만, 그건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필사의 심정으로 기적을 쫓을 뿐’인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사시는 ‘언제 죽어도 좋다라는 위대한 각오’에서가 아니라 “여유가 일체 없는 무의식” 속에서 매달릴 수 있는 모든 것에 매달려 길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거지요. 안고는 이런 무사시가 처절하면서도 아름답다고 묘사하는데요, 안고가 거기에 무사시만의 떳떳함, 자부심 같은 것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사시를 보며 얼마 전에 채운샘이 《역사서설》 강의 중에 전야민들의 ‘아싸비야’에 대해 이야기 해준 것이 떠올랐습니다. 아싸비야는 거친 유목생활과 연대감에서 나온 유목민 특유의 자부심 같은 건데요, 보통 학자들이 애국심으로 환원하는 이 힘을 들뢰즈는 국가의 안팍에 있으면서 국가에 포섭되지 않는 힘(전쟁기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놀라웠던 건 전야민들이 타종족이나 도시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행동이 스스로가 강자라는 당당함·떳떳함에 기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침략이나 약탈은 나쁜거야, 무자비해라고만 생각했는데 외부에 휩쓸리거나 의존하지 않는 그 힘 자체를 나쁘다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사시의 검법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그저 유치하거나 얍삽한 술책이 아니라 진짜 강자의 검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사시는 시합 하나하나 마다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세심하고 주도면밀하게 치밀한 계산을 마치고 일생동안 행한 수련을 쏟아 부었으며” 동시에 “계산이나 수련과 상관없는” 필사의 술책으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정통적인 방법으로 뚫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계산도 수련도 소용이 없었겠지요. 그랬을 때 그가 가진 필사의 기술, 기본은 의식하지 않고 발휘되는 살아야 한다는 생명차원의 능동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 강렬해지는 심층의 긴장감(?) 같은 거요. 여기서 제멋대로 하는 거 같지만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고 그에 맞춰 치밀하게 계산하고, 또 그것이 소용없는 순간엔 방향전환이 가능한 무사시만의 독특한 검법이 나오지 않았을까. 알 듯 말 듯 쉽지 않지만, 안고에게 글쓰기도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안고 시대 전쟁을 미화하는 담론 속에 청년들이 동원되고 있었고, (어제 일본 불교 근세에 대해 강의해 주신 허남린샘에 의하면) 종교가 국가 제도화되어 일본인의 의식에 깊이 뿌리 내리던 시대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그 가치와 규칙들 속에서 안고는 <청춘론>으로, 소설로, 글쓰기를 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간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 번역 부분에서는 안고가 자신의 청춘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 올려봅니다.
死ぬることは簡単だが、生きることは難事業である。僕のような空虚な生活を送り、一時間一時間に実のない生活を送っていても、この感慨は痛烈に身にさしせまって感じられる。こんなに空虚な実のない生活をしていながら、それでいて生きているのが精一杯で、祈りもしたい、酔いもしたい、忘れもしたい、叫びもしたい、走りもしたい。僕には余裕がないのである。生きることが、ただ、全部なのだ。
そういう僕にとっては、青春ということは、要するに、生きることのシノニイムで、年齢もなければ、又、終りというものもなさそうである。
僕が小説を書くのも、又、何か自分以上の奇蹟を行わずにはいられなくなるためで、全くそれ以外には大した動機がないのである。人に笑われるかも知れないけれども、実際その通りなのだから仕方がない。いわば、僕の小説それ自身、僕の淪落のシムボルで、僕は自分の現実をそのまま奇蹟に合一せしめるということを、唯一の情熱とする以外に外の生き方を知ら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だ。
これは甚だ自信たっぷりのようでいて、実は之ぐらい自信の欠けた生き方もなかろう。常に奇蹟を追いもとめるということは、気がつくたびに落胆するということの裏と表で、自分の実際の力量をハッキリ知るということぐらい悲しむべきことはないのだ。
だが然し、持って生れた力量というものは、今更悔いても及ぶ筈のものではないから、僕に許された道というのは、とにかく前進するだけだ。

죽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나처럼 공허한 생활을 하면서 한 순간 한 순간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생활을 하더라도 마음에서 생기는 감동이 통렬하게 몸에 스며들면서 느껴진다. 알맹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이렇게라도 살아 나가는 것이 나에게는 최대한의 노력이며, 기도도 하고 싶고 술에 취해도 보고 싶으며 잊고 싶기도 하다. 외치고 싶고 달리고도 싶다. 나에게는 여유가 없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전부인 것이다.
그러한 내게 청춘이란 것은 그러니까 살아간다는 일과 같은 의미이며 연령도 없으며 또한 끝맺음도 없는 것과 같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것도 또한 내 능력 이상의 기적을 이루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동기도 없다. 사람들이 웃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말한 그대로이다. 말하자면 나의 소설 그 자체가 나의 윤락의 상징이며 나는 나의 현실을 그대로 기적과 합일시키려는 일을 유일한 정열로 삼는 것 외의 삶의 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일은 대단히 자신감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토록 자신감이 부족한 삶도 없을 것이다. 항상 기적을 좇는 일과 정신이 들 때마다 낙담하는 일은 동정의 양면의 같아서 자신의 진정한 역량을 아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 역량이란 이제 와서 원통해 해도 소용없기 때문에 나에게 허용된 길이란 전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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