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2.27 니나노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02-27 20:05
조회
52
恋情の発するところ自然にして自由なるべきものが、然し決して自由ではない。このことほど型を逃れがたい、又自らの自然の姿勢を失ひ易い不自由なものはほかに少いやうである。
たまたま私の身辺に甚だ型破りな、ちよつと判断に迷ふ恋の実例があつたので、その荒筋を書いてみよう。

연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일이지만, 그러나 결코 자유가 아니다. 이것만큼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또 스스로 자연스런 자세를 잃기 쉬운 부자연스러운 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어쩌다 내 주변에 매우 파격적인, 좀 판단이 망설여지는 사랑의 실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 황당한 내용을 써 보겠다.

 

자유란 타락이나 파격이 아니다

사회에서 주어진 길을 따르지 않는 것, 가령 학교나 직장 혹은 가정 뿐 아니라 도덕이나 규범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이 자유일까. 안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무리 ‘파격적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틀에서 벗어난 것인가’하는 문제는 또 다르다는 것이다.

<불가해한 실연에 대해서>는 한 50대 미술선생인 노신사의 ‘불가해한’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선생은 매일 남성들을 제외한 미소녀 제자들과 산책을 했는데, 그 중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 무렵 선생이 젊고 쾌활한 아름다운 청년들을 산책 멤버로 추가한 것이다. 자연스레 청춘남녀들은 각자가 사랑을 시작했고 거기에 선생이 사랑한 소녀도 있었다. 이 후 야수의 형상을 하고 길을 걸어가는 선생을 봤다거나 비를 맞으며 숲속으로 들어가는 선생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소녀는 결혼했고, 선생은 산책을 그만두었다. 통통했던 선생이 갑자기 마르고 노쇠해져 병자처럼 변했다고 한다.

이런 선생에 대해 혹자는 선생의 신체적 결함 때문 이라거나 혹은 뒤틀린 욕망의 발현이라 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선생이 그 나이에 첫사랑 하는 거라 완전히 헤맨 것이라 말하기도 있으며, 첫사랑이 때문에 일부러 사랑의 적수를 만들어 내는 건 더욱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론은 알 수 없다.

세미나 때 그럼 도대체 이 글에서 안고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중에 선민샘이 말씀해주신 내용 정리를 들으면서 의아했던 몇 구절 중에 풀린 게 있었다. 결론은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실연을 ‘이해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안고는 선생의 사랑이 뭔가 남다른 것처럼 보여도 ‘뭔가를 따라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선생의 사랑이 ‘우습지만 또 슬프고 그 절실함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삶의 힘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감격’을 받는 것처럼 ‘선생 스스로 자기를 타인처럼 감격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파격일지 모르나 ‘투영된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려(<남녀교제에 대해서>사카구치 안고. 이한정샘 번역 중)’했던 것이다. 안고는 이를 ‘본능에 따랐기 때문(같은 글)’이라고 본다. 자유는 ‘도덕이나 인심의 타락(같은 글)’도 아니고, ‘불행한 사랑을 보고 따라하는 것(<불가해한 실연>사카구치 안고. 이한정샘 번역 중)’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자유를 ‘본능’의 문제와 연결해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안고의 수필 혹은 소설들을 읽으면서 더 고민해 보아야겠다.

 
見給へ、我々がかうして先生の恋をふりかへつてみると、滑稽だが又悲しくその切なさがむしろ我々に生す力を与へるやうな感激があるぢやないか、我々が先生の恋からこんな感激を受けるやうに、先生自ら自分を他人の如く感激の対象に捨てさつたのぢやないかな。勿論いざやつてみると、自分の姿に感激するどころの騒ぎではなく、先生一瞬にして老衰し果てる始末となつてしまつたがね。

然りとすれば先生ほど人生の切なさに徹した悲劇役者も稀なんだらうぜと呟く者もゐたが、こんなの尚更当にならない。先生は真の騎士で、愛する人にまことの幸福が与へたかつたのだらうといふ解釈もあらうが、これこそ愈々もつてありさうもないことである。

不幸な恋は深刻さうであるが、必ずしもさういふ理窟はなりたたないだらう。最大の愚、不幸な恋をみならふこと。

보아 두길 바란다. 우리들이 이렇게 선생의 사랑을 되돌아보면, 우습지만 또 슬프고 그 절실함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삶의 힘을 주는 듯한 감격이 있지 않은가, 우리들이 선생의 사랑에서 이러한 감격을 받는 것처럼 선생 스스로가 자신을 타인처럼 감격의 대상으로 미련 없이 버렸던 것은 아닐까. 물론 막상해보면, 자신의 모습에 감격할 정도는 아니라 한 순간에 선생이 완전히 노쇠한 꼴이 되어 버리긴 했어도.

그렇다면 선생만큼 인생의 간절함에 철저했던 비극 배우였던 사람도 드물지 않겠어? 라고 중얼 거리는 자도 있었으나 이런 말은 더욱더 가당치도 않다. 선생은 진정한 기사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고 싶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겠으나 이야말로 정말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다.

불행한 사랑은 심각한 듯 보이나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어리석은 것은 불행한 사랑을 보고 따라하는 일.
전체 2

  • 2019-02-28 09:58
    선생의 실연을 단지 불가해한 기행으로 보지 않고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청춘의 어려움'으로 해석한 안고는 정말 대단한 거 같습니다. 안고의 글은 정말 일관되게 <청춘론>이네요.

  • 2019-03-01 22:30
    안고의 난해하고도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생각하게 하는 글이 일본어에 빠져들게 하네요.
    이게 원문으로 읽는 재미인가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