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9. 10 청소후기(옥상조)

작성자
감자
작성일
2016-09-12 21:58
조회
510
9월 10일 후기가 여러 개 네요. 제가 잘못쓰고 있는 건 아니겠죠?ㅎㅎ

이번 시간에는 『풀 베개』를 읽고 토론을 했습니다.


우선 건화가 공통과제에 쓴 ‘동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읽은『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소세키는 “모든 인간이 개성을 주장하면서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개성이 발달한 결과 언제고 ‘나’는 ‘나’임을 잊지 못하는 것을 근대인의 불치병으로 진단하기도 했었는데요. 건화는 ‘동화’가 이런 ‘근대적 자아’가 해체 될 때 가능해지는 태도, 쉽게 말하자면 ‘나’를 잊는 태도인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에 더해 옥상쌤은 『풀 베개』의 ‘동화’가 주인공의 감정을 주구절절 설명해주며 독자와 인물의 감정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근대 주류 소설의 동화가 아니라. 도연명의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처럼 작가도, 작가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물아일치’의 지경과 비슷한 태도인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 동화를 가능케 하는 ‘여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는데요. 모두를 몰개성하게 같은 속도로 실어 나르는 기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았을 때, 옥상 쌤은 여유, 자연, 글쓰기, 그림그리기…이런 것들만이 기차의 속도를 늦추는(?), 아니면 그 사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여유는 쉽게 실천하긴 어려운 것 같은데, 시와 그림 모두 ‘찰나’에 쓰고 그리는 『풀 베개』의 ‘나’를 보면 그 순간순간의 발견도 결국은 이해득실을 따지며 감정의 널뛰기를 하는 것에 거리를 두고 ‘여유’라는 태도로 노력해야 가능한 것 아닐까 하셨습니다.


이에 건화는 ‘여유’를 잠깐 쉬어 가는 것 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쉬어간다는 뉘앙스의 여유는 맞닥뜨린 문제를 피하거나 우회하는 것일 수 있는데, 『풀 베개』에서는 여유가 비인정적인 흥취에서 근대적 자아나 자각심이 풀어지는 시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소극적인 느낌의 ‘쉬어가는 여유’가 아니라 적극적인 ‘반근대적 태도’일 수 있다. 어떤 책에서 ‘반 근대’라고 말할 때는 전근대도 아니고 초 근대도 아니고, 근대 안에 있는 와중에서 근대의 모순이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의식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소세키가 『풀 베개』에서 말한 ‘여유’는 반 근대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태도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시기의 소세키는 서양을 경탄의 대상이 아니라 결여의 대상으로 발견을 했다”는 황호덕의 해설처럼, 어떻게 보면 『풀 베개』의 ‘나’도 인정세계의 사람들과, 인정세계의 그림, 문학, 그리고 나미에게 없는 표정까지 그 세계에서 결여된 무언가를 계속 찾으려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었는데요. 옥상 쌤은 그런 점이 소세키가 반 근대적인 대안을 찾으려했던 것과 연결되며 비인정한 것들에 대한 발견 자체가 이미 인정세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30년대에 나왔던 ‘전통담론’도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담론이 아니라 근대화된 기반 위에서 새롭게 발견된 ‘전통’이니까. 『풀 베개』의 비인정 세계도 인정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윤몽언니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 속 많은 주인공들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그림 속에 있는 여자처럼 스펙터클로 바라보는데 그 대상화하려는 시선이 소세키가 말하는 ‘탐정의 시선’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런데 그 반대 선상에서 다뤄지는 ‘화공’의 시선이 이전 주인공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들과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혜원언니 역시 『풀 베개』의 ‘나’가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을 나미에게 투사하며 오필리어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어떤 원하는 모습을 포착해서 소유하려는 시선이 탐정의 태도랑 뭐가 다른가? 그리고 『산시로』에서 산시로가 미네코를 보는 시선과 ‘나’가 나미를 보는 시선은 다른 시선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옥상 쌤은 『풀 베개』의 ‘나’는 계속 제 3자의 위치에서 대상을 묘사하려 하고, 나미에게 감정적인 동요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나미와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는 제 3자의 자리에서 나미를 보려했다는 점에서 산시로가 미네코를 보는 시선과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오필리어를 나미에게서 보려 했다기보다는 서양의 오필리어 얼굴에 필적할 수 있는 동양적인 얼굴, 즉 내재적인 ‘아와레’의 얼굴을 찾은 걸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건화는 돗포의 『무사시노』를 읽어보았다는데, 소세키의 작품들에서 자주 ‘만주’나 ‘러일전쟁’, ‘전차’ 등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소재가 반복해서 나오는 반면 <무사시노>에서는 정말 그냥 읽어서는 시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대와 사회적 배경은 생략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상황이기도 하였지만 소세키의 여러 작품에서 만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에게 만주는 무엇이었을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전쟁을 의미하는 만주행 기차가 도시와 시골 구분 없이 손을 뻗어 인력을 실어 나른다는 점에서 그 맥락이 딱 ‘운반된다’는 말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혜원언니는 만주로 간다는 건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거나 사지로 가는 것이므로 죽음과도 연결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책 속 ‘동백꽃’에 대해 너무 화려하고, 한 번에 사람을 사로잡히게 만들지만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으므로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는 묘사가 나미뿐만 아니라『우미인초』의 후지오의 이미지나 근대의 일루미네이션에 대한 묘사와 비슷하게 보였는데요. 그렇다면 너무 화려해서 “그림이 될 수 없다”던 나미도 그림이 될 수 있게 한 ‘연민’은 무엇일지, 그 연민은 <산시로>에서 나왔던 ‘연민’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왜 ‘비인정의 얼굴’을 하필 나코이에서 유일무이하게 도쿄 생활을 했던 나미로부터 찾았던 것일까에 대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전체 4

  • 2016-09-13 12:38
    첫 문장이 무슨 말인가 하고 봤더니 내가 9월 6일에 당당하게 '9.10 후기'를 올렸었네...ㅎㅎㅎ; 그나저나 정말 꼼곰한 후기!! 앞으로 우리 조 후기는 감자한테 맡겨야할 듯!? 마지막 질문들 정말 중요한 것 같지만 해결 되지 않는...특히 연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네요.

  • 2016-09-13 14:01
    우리도 나미씨 얼굴에 떠오른 '연민'이 대체 뭐냐고 이야기하다 토론이 끝났는데. 짧은데다가 초기작이라 만만하게 봤는데 <풀베개>, 읽어보니 함부로 말하기 아주 어려운 작품이었네요;

  • 2016-09-13 18:47
    건화 물타기 해도 소용없아^^
    감자 열심히 받아적더니 꼼꼼하다!! 누가 무슨 얘기 했는지 새록새록 기억나 ㅋㅋㅋㅋㅋ 풀베개 연민과 산시로 연민이 뭔지 얘기하다가 아마 다를것이다~ 하고 뭉갤 수 밖에 없었던 ㅠㅠ

  • 2016-09-13 19:18
    물타기는 아니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