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9. 3 청소 후기 (옥상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9-06 14:20
조회
531
이번 시간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읽을 때는 참 재밌게 읽혔는데, 뭔가를 쓰려고 하니 방대한 분량과 일관성 없는 이야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조(옥상쌤 조)에서는 각자가 마주했던 어려움을 토로하며(^^;)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제가 글에서 다룬(다루려다 만) ‘지식인’에 대해서 얘기 나눴습니다. 저는 (안일하게) 학문이 입신출세의 도구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해서 썼는데, 옥상쌤은 그 부분을 좀 더 따져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이지 초기에는 정말로 학문이 출세의 길로 여겨졌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러일전쟁의 시기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마치 지금처럼 학위를 지닌 사람이 흔해지고 그 가치가 떨어져서 고등유민이 나타나는 시기였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제 글은 문제를 던지지도 못한 셈이지만, 그럼에도 소세키를 읽으며 메이지 지식인이 놓인 위치를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해 보입니다. 다른 분들도 말씀하셨지만 소세키가 소설 속에 주요하게 등장시키는 인물들은 모두 양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옥상쌤은 구샤미같은 인물이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이지 일본은 서양을 기준으로 삼고 모든 것을 끼워 맞춘, 외발적이고 껍데기뿐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한편으로 구샤미는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이전에는 주어지지 않았을 공부의 기회를 얻은 것이기 때문이죠. 구샤미와 그의 집을 드나드는 지식인들은 메이지 일본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동시에 거기에 빚진 채로만 그와 같이 존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고양이의 표현에 따르면 “넓은 도쿄에서도 그다지 예를 찾아보기 힘든 일당백 호걸들”인 이 괴짜 지식인들이 놓인 자리를 좀 더 세밀하게 파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굉장히 오묘한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분명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의 주류적 가치와 불화하고 있습니다. 가네다+하나코와의 트러블이 그것을 잘 보여주죠. 그런데 이때 이들이 거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네다와 같은 사업가의 가치는 서양으로 대변되는 주류적 가치와 일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서양의 문물에 밝고 박학한 구샤미들의 눈에 촌스럽고 진부하게 비치는 구시대적인 것일까요? 구샤미들은 근대적인 교양에 젖어 그러한 말들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비틀어버리는 메이테이의 거짓말은 또 무엇일까요? 거기에 더해서 한 명의 문학가이자 지식인으로서 고양이의 눈을 빌려 자신과 닮은 인물들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는 소세키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고, 이들을 어딘가에 위치 짓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세키가 그리는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붙잡히지 않는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감자는 공통과제에서 이런 부분을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연관시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지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서구적이거나 동양적인 각종 방도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지식과 돈, 지위, 예술과 사람, 고대 그리스와 불교” 등 모든 것들이 개인 앞에 선택의 문제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구샤미들이 놓여 있는 자리가 불명확한 것은 이들 각자의 별난 성격 때문이기 이전에 ‘근대적 개인의 탄생’이라는 시대적 맥락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바로 이 ‘개인’에 대해서 함께 얘기 나눴습니다. 많은 분들이 뒷부분에 나오는 탐정 이야기에 꽂히셨는데, 거기에서 구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해석에 따르면 현대인의 탐정적 경향은 바로 개인의 자각심이 너무 강해지 게 원인이라고 생각하네. 내가 자각심이라 명명한 것은 도쿠센이 말하는 견성성불이라든가 자기는 천지와 동일체라는 깨달음 같은 것과는 다른 거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580)

근대가 이러한 ‘자각심’의 작용을 통해서, 자신을 의식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뒤에서 도쿠센은 구샤미의 말에 덧붙이며 예전에는 자신을 잊으라고 가르쳤는데 이제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이야기 하죠. 실제로 근대적 제도들이 물밀듯이 유입된 메이지 일본에서 자신을 잊으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부적합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자신의 토지에 붙어서, 가문이나 마을 공동체에 속한 채로 먹고 살던 이들에게 근대적 자의식, 자각심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 군대, 공장, 병원 등 사람들을 통계적으로 관리하고 인적 자원으로 다루는 근대적 제도들은 각 개인의 자각심, 자의식이 너무나 중요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학교나 군대에서는 각 개인들에게 소속과 번호, 위치 등을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지죠.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없을 것입니다. 번호를 부여하고 다른 이들과의 구분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질 것입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학교, 군대, 공장에서 갑자기 “자기는 천지와 동일체라는 깨달음”을 얻어 버리면 큰일이죠.

그런데 이것이 탐정적 경향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요? 탐정은 단서들을 종합해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냅니다. 탐정은 물증이나 어떤 객관적 지표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고 그것들을 종합해서 그가 추적하는 사건과 사람에 대한 진실을 이끌어냅니다. 학교나 군대와 같은 근대적 시스템이 번호를 부여하고 구분을 통해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각심을 가지게 했다면, 탐정은 개인들에게 부여된 객관적 사실들을 종합하면 그 개인에 대한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자입니다. 구샤미가 말하는 ‘자각심’은 근대인들을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탐정이 되게 만듭니다.

다음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이야기 형식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소세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확인했지만 이 소설은 특히 더 ‘줄거리 없음’이 부각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가네다 부부와의 갈등과 간게쓰의 연애사, 구샤미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고뇌 등 중심적인 주제로 놓일 만해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어물쩡 넘어가고, 이야기는 끊임없이 삼천포로 빠집니다. 옥상쌤은 이것이 일종의 실험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심 없이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고양이의 시선은 우리가 의미 부여하는 것들, 특별하게 여기는 것들, 또는 어떤 목적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옥상쌤은 요즘 ‘왜 사냐’를 고민하고 계신 듯한데, 고양이의 시선은 ‘왜’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 목적을 찾는 것도 자각심에 의한 근대인의 작업일 수 있다는 말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고양이가 처음 등장하고 마지막에 가서 죽음을 맞이하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그 외에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후기를 쓰면서 느낌을 공유하는 차원을 넘어서 좀 제대로 토론을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공통과제를 똑바로 써와야겠죠...(ㅠㅠ)
전체 5

  • 2016-09-06 15:01
    근데 애초 너는 왜 메이지시대의 지식인에 꽂힌 거야? 혹은 소세키의 작품에서 지식인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들을 독자에게 던지는 고야? @.@

    • 2016-09-06 15:08
      ㅋㅋ 지식인 컴플렉스 아닐까.... 자기가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식인이거나,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지식인이거나! 근데 건화야, 지식인이 모야?^^

  • 2016-09-07 15:24
    우아~ 그 중구난방의 혼란을 이렇게 그럴듯한 문장들로 풀어내다니~ 역시 우리 건화, 살아있네~~~~

  • 2016-09-07 18:29
    풀베개에도 '탐정'에 대해서 나왔음! .... 뭔지는 기억 안남-.-

  • 2016-09-08 08:56
    우리가 이런 토론을 했던 말인가ㅋㅋㅋ 자꾸 옥상쌤의 왜사냐~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