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4월 24일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1-04-21 15:08
조회
105
이번에 읽은 <계사전>에서 토론의 중심(?)은 안회였습니다. 안회는 한 번 잘못한 것을 두 번은 하지 않았다고 하죠. 저희 조에서는 '그럼 안회는 어쨌든 늘 새로운 잘못을 했다는 건가?' 같은 질문도 나왔습니다만^^;; 사실 주목할 부분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그의 반성적 태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반성은 주로 서양의 reflection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반성은 늘 외부의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늘 어떤 기준에 '비추어' 반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준, 평판, 도덕성 같은 것이 요구되지요. 그렇다면 안회의 반성은 어떨까요? 동양에서 주된 움직임은 늘 '돌아감(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돌아갈 곳은 결국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번뇌를 만든 것은 자신이고, 그것을 해결할 열쇠도 자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채운샘 강의에서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성경의 '돌아온 탕자'입니다. 멋대로 집을 나갔다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의 불교 버전은 어린시절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아들에게 주고 싶어 하지만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아들은 감당할 수 없다며 거절을 거듭하지요. 이 이야기는 애초에 모든 것이 자기 것인데 그걸 알지 못하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이미 자신이 부처인데도 그것을 모르는 인간의 안타까운 처지! 중국에서 '돌아감' 역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능력을 키운다든가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에는 자유나 해방을 뜻하는 어휘가 없습니다. 이건 발전적이지 못한 게 아니라 그런 게 필요 없는 사고방식을 영위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나에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동양의 움직임이 정적이고 변화라고는 없는 오해를 해선 안 됩니다. 성인은 우환의식 끝에 <주역>을 지었다고 합니다. 세상 일을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이 분명 동양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환의식은 자기를 위하다보니 다른 것들도 함께 위해야 위험하지 않겠다는, 그런 소극적인 마인드가 아닙니다. 나와 공존하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내는, 자비심 넘치는 마음이지요. 왜 성인에게는 이러한 우환의식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건 전체에 대한 통찰 속에서만이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윤리는 단순히 보편적 도덕과는 다른 결을 갖게 됩니다.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이 다른 시점에서 보면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가령 무왕과 탕왕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오랫동안 칭송받았습니다. 만약 이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는 도덕성만을 붙잡고 있었다면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었겠죠. 이런 점에서 윤리는 철저하게 상황논리를 따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상황 안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없는 것이죠.
다음주에는

<계사전> 끝까지 읽습니다.
<주역> 택산함, 택지췌 읽습니다.
<티마이오스> 끝까지 읽습니다.
질문과 이야기 할 부분 체크해 오는 거 잊지 마시구요~

후기는 정랑샘
간식은 은남샘, 수정

일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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