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2주차 후기

작성자
박주영
작성일
2021-05-16 20:30
조회
95
   우중충하고 비가 오는 날씨의 탓일까요? 업무과다, 컨디션 난조 등으로 2주차 수업에서는 유난히 결석이 많았습니다. 경희샘, 승연샘, 정아샘, 저 이렇게 4명이 단출하지만, 「우상의 황혼」, 「죄와 벌」, 개별 에세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네요. 4명이라 마지막 에세이 코멘트 시간은 일찍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1인당 40분 정도를 할애하며 옆 조와 비슷한 시간에 끝났습니다.

1.「우상의 황혼」

   1교시에 가장 오랫동안 얘기했던 주제는 내 주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긍정 문제였습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타인을 선/악의 구도, 심판자의 구도로 보면 안 된다고 들었고 이를 되새기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왜 이것이 잘 작동하지 않을까요? 일단 이런 타자를 마주했을 때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니체도 이런 감정이 나쁘다고 말한 것은 아니죠.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신체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니체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소망인 ‘영혼의 평안’을 오히려 매우 낯선 것으로 봤으며, ‘영혼의 평화’는 한갓 오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빨리 해소하고 싶은 마음, 평안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니체는 피로의 시작일 수 있다고 하네요. 생각해보면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여유가 없을 때 나는 더 타자의 행동을 못 견뎌했던 것 같습니다.

  조원들과 얘기를 해보니 각자 참을 수 없는 타인, 스트레스가 다른 것 같았는데요. 이를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볼 수 있고, 나의 번뇌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혼자 있을 때에 나는 ‘군자’, ‘도인’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착각을 하지만, 나의 습을 건드리거나 일에 대한 견해가 다른 타인을 만나는 순간 감정이 올라오는데요. 이럴 때 그를 심판자적인 위치에서 평가하지 않고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게 참 어렵습니다. ㅋㅋ 그리고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불편함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우리는 신체적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그 불편함을 참 못견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을 빨리 없애고 싶은 마음은 니체가 비판한 그리스도교적 거세, 멸절과 맞닿아 있는데요. 불편함을 해소하기보다는 어떻게 불편함과 같이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책임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요. 니체는 “인류를 신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책임있게’ 만드는 데에 즉 인류를 그들에게 의존적으로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 의지에 대한 학설은 근본적으로 벌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우상의 황혼」 122p)라고 말했습니다. 책임에 대한 우리의 기존 생각(책임을 지는 자가 강한 인간)을 깨뜨리는 말이죠.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책임은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책임하고 다른 의미입니다. 니체의 글이 어려운 이유가 같은 단어라도 쓰인 맥락에 따라 달리 파악이 된다는 거죠. 일단 「우상의 황혼」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 7에서 말하는 책임은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의 책임과 관련된 건데요. 개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한 행위(니체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판결하고 처벌될 수 있기 위해- 죄 지을 수 있기 위해 부여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행위를 하도록 놓여진 사람에게 그 행위를 했다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죠. 놀라운 혜안입니다!)에 대해 책임을 묻고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장치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런 책임은 개개인을 신학자들(벌을 규정하는 권한을 갖는 자를 의미)에게 의존적으로 만듭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책임을 찾는 곳 어디서든 벌이나 판결이 요청됩니다. 회사에서도 법, 규정에 대한 징벌체계가 강화됨에 따라 책임이 막중한 업무에 대한 회피가 늘어나고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더 수동적으로 되고 있는데요. 우리에게 성직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법에 대한 의존성(법대로 하자, 법으로 판결하자 등), 강력한 법에 대한 요구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죄와 벌」

  조원들 모두 「죄와 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흡입력,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앞으로의 내용을 궁금하게 하는 스토리텔링, 지극히 도덕적인 자의 복잡한 내면에 대한 묘사 등에 대해 공감했는데요.

  라스꼴리니코프(이후 ‘로쟈’)는 질병에 불과한 전당포 주인 노파를 살해했지만, 즉 일종의 이상구현, 사회정의 실현을 행한 것이지만,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도덕과 신체에 새겨진 도덕의 불일치랄까? 그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뽀르피리와 논쟁도 하고 있지만, 정작 뽀르피리가 조용히 하라고 말하니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복종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분노와 증오는 살인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내가 사회의 질병인 자를 살해했으면 분노가 해소되거나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할텐데 로쟈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리쿠르고스, 솔로몬, 나폴레옹 등 인류의 은인과 건설자들 대부분이 무서운 살인자였다고 말하며 새로운 것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면서, 정작 자신은 살해를 하고 나서 이에 대해 감당하지 못하고 있네요. 그는 실제 자기 내면의 양심에 따라 피를 뛰어넘을 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라고 여기는 듯 살인 이후에 오히려 더 혐오감, 자학에 빠져드는 모습이네요. 저희는 ‘이렇게 고통을 받을 거면 왜 살인을 했을까?’, ‘나 같으면 불안함과 두려음을 못 견뎌서 오히려 경찰서로 가 자백을 하겠다.’, ‘로쟈는 불안함, 두려움 등의 고통을 통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등의 얘기도 나눴습니다.

  로쟈는 선을 넘어갔다는 점에서 소냐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는 소냐가 생계 때문에 창녀가 된 것을 스스로를 죽여버린 행위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을 참을 수 없을 것이고 로쟈처럼 미쳐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로쟈의 해석이죠. 일단 지금까지 묘사된 소냐의 모습에서는 자학, 혐오감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험한 상황에서도 고결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상이 보였던 것 같아요. 5, 6부에서 소냐와 로쟈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3. 에세이 코멘트

1) 승연샘

  승연샘은 이번에 다시 공부를 하게 된 얘기를 인트로로 가져왔고, 잠깐 쉬는 동안 공부에 대한 절실함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작년 마지막 에세이 피드백에서 쌤에게 불편했던 지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쉴 때 느꼈던 공허함과 무의미함(2013년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같은 동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에세이 피드백과 공허함, 무의미함이 별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니체라는 렌즈를 통해 이를 잘 들여다보시면서 쌤이 왜 공부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2) 경희샘

  저희가 보기에 천사같은 경희샘이 주제를 항상 경희샘 같지 않은 것을 들고 온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가까운 사람에게 함부로 하고 의견을 강력하게 말하는 것 같아서, 소중한 자들에게 귀기울이고 상냥한 관계를 맺고 싶다고 했는데요. 쌤이 함부로 한다는 수준이 어떤 것인지 저희가 물어보고 답을 들어본 결과 도덕적 기준이 매우 매우 높은 걸로. 경희샘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타인이 보는 모습이 매우 다른데 이걸 보셔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네요. 오늘의 일화를 인트로로 하고 경희샘의 강한 도덕적 전제와 기준을 보시는 글을 써오는 것이 과제입니다.

3) 주영샘

  저는 일단 ‘친구없는 니체’란 표현이 걸린다는 의견을 들었는데요. 전기를 보면 페터 가스트 등 그와 오래 교류했던 지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수정하고, 중간에 있는 문제제기를 앞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제하고 있는 ‘우정’과 니체가 말하는 ‘우정’이 무엇인지 보고, 이와 함께 니체가 말하는 친구와 적의 개념도 같이 고민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4) 정아샘

  정아샘은 니체와의 첫만남과 내 발 밑의 문제를 구분해서 썼는데, 전자가 너무 긴 것 같으니 좀 줄여서 두 부분을 합쳐서 쓰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조율 문제와 함께 ‘정도’와 ‘최고의 방법’을 찾으려는 마음에 대한 문제를 들고 왔는데요. 일상의 조율에 대한 문제가 공감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정아샘은 전반적으로 더 고민을 해보고 글의 구성과 문제제기를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전체 2

  • 2021-05-17 12:38
    우와~ 주영샘 후기 읽으니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한 눈에 그려져요. 경희샘 같지 않은 거 들고 오시는 경희샘과 주영샘의 친구없는 니체 왜케 웃기죠ㅋㅋㅋㅋ 차분한 후기인데 넘 웃겨서 한참 웃었어요. 함께 공부하는 도반의 의미도 니체의 우정과 함께 생각해보면 재밌겠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할 때에는 어느 지점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는지, 그 반복되는 지점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더라구요. 힘의 다수성으로서의 차이의 문제와 함께 생각한다면 그 불편한 존재를 좀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 2021-05-18 09:48
    토론 정리 때 승연샘께서 '활발하게 토론했다'고 얘기하셨는데, 주영샘 후기를 읽으니 확 와닿네요ㅎㅎ
    책임과 자유로운 행동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데에는 탓하고 처벌하려는 의지가 앞서서 있다는 것은 말씀대로 정말 놀라운 혜안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가 보여주듯 우리 안에는 책임을 물을 행위주체자로서의 이성이나 자유의지를 가진 자아는 콕 집어낼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질문이 듭니다. 그럼 윤리적인 약속을 어겼을 땐 어떻게 하나? 누구에게 책임을 묻나? 자기도 모르는 충동들이 행동을 이끌어가는데? 묻지 말하야 하나?
    댓글에서 갑자기 질문이 나와버렸네요... <죄와 벌>을 읽으며 고민해보면 좋을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