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3주차(5.22)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5-18 12:08
조회
108
<우상의 황혼>을 적은 분량씩 읽으니 더 많은 것들을 자세히 보게 되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작년에 헐레벌떡 읽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아마 저번 학기 유고를 읽은 덕에 더 생생하게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저희 조는 과제를 써오시는 스타일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씨앗 문장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과 현재 문제를 풀어보는 글, 개념을 논리적으로 질문해보고 답해보는 글, 니체의 설명을 자기 말로 정리해보는 글 등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더 재밌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희는 주로 <반자연으로서의 도덕>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질문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어떻게 충동들을 거세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비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도덕과 교회가 열정들(감성, 소유욕, 지배욕, 성욕, 정념 등)을 대하는 방식은 치과의사처럼 뽑아버리고 멸절시켜버리는 ‘거세적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이 우리에게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또 그런 거세와 멸절은 자기 안에 스스로 척도를 세우지 못하는 자들이 욕구와 싸울 때 선택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정서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저희는 우리가 우리 안의 미세하고 순간적인 충동과 정념을 신속하게 무시해버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순간적 분노나 어처구니없는 욕구, 불쑥불쑥 튀는 불만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능숙하게 억제되고 사라집니다. 사실 우리는 불확실하고 제멋대로인 것들 모두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마찬가지죠. 병은 수술하고, 불편한 인간관계는 차단하고, 오점이 있는 공인은 끌어내립니다. 모든 곳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촘촘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고통을 제거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 교회적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픈 것은 싫기에 소소하고 확실한 마취제를 찾습니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니체가 말하는 ‘열정의 정신화’, ‘열정에 대한 지성적 투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워딩만 보면 마치 정신주의를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니체는 이것을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 척도를 세우는 자들, 즉 비도덕주의자들의 특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성적 투쟁이란 무엇일까요? 단편 곳곳에서 힌트를 찾아보면 이것은 “어떻게 특정 욕구를 정신화하고 미화하고 신적으로 만드는가?”라고 질문하는 일인 것 같았습니다. 거세적 방식의 전제는 자기 자신과 정열 사이에 ‘단절’을 도입하고 그것에 ‘최종적인 적대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도덕주의자는 자기에게서 부정해야 할 어떤 것도 발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확실한 충동과 사건들은 질문되어야 하고, 새롭게 서사를 부여받아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분노를 아레스의 활동으로, 성욕을 에로스의 활동으로, 잔혹한 운명을 모이라의 영역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단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유와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일을 열정에 대한 지성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며 니체의 생리학적 접근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서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2교시 <죄와 벌> 토론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를 비교했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먼저 나온 이야기는 ‘원칙을 죽였지만 원칙을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열입니다. 원칙은 무엇일까요? 저희가 이야기 나눈 바는 이렇습니다. 노파로 상징되는 원칙은 철저한 계산과 교환관계에 바탕한 도덕입니다. 2+2=4로 떨어지는 명확한 세계인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는 늘 가혹한 불평등이 생겨납니다. 마르멜라도프의 가족이 겪은, 소냐를 거리로 내몬 ‘극빈’이지요. 라스꼴리니꼬프는 이것을 참지 못해 어떤 도덕적 사명감으로 노파를 죽이지만, 그 자신이 그런 원칙을 뒤엎고 나아갈 만큼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자각합니다. 새로운 도덕이 기존의 도덕을 이기지 못한 걸까요? 헷갈립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노파의 원칙이 공리주의일까요, 노파를 죽이고 돈을 나누겠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원칙 파괴가 공리주의일까요?

어쨌든 라스꼴리니꼬프는 2+2=4의 세계에 남아 자책 혹은 죄의식 비슷한 것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선을 넘은 자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또 다른 극에서 선을 넘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냐입니다. 자신은 원칙을 죽였지만, 소냐는 원칙에 죽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가 스스로를 죽여버렸다고 말하죠. 그리고 자신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뭘까요? 망명이라도 가려는 걸까요? 자살일까요? 그런데 그는 소냐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소냐는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 혹은 타락을 감당해내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녀가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이것이 강의에서 들은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인 것은 같은데, 뭘까요? 위대한 고통이라고 묘사되는 이것은 분명 저희에게는 없는 특성일 것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저희도 궁금해했을 어떤 영성 같은...? 소냐가 보여주는 이런 구원의 이미지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이번주가 마지막이니 구원의 문제가 어떻게 풀릴지 기대되네요!

3교시에는 에세이 토론이 있었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조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이런저런 코멘트를 해주었는데요. 무엇보다도, 허무, 양심의 가책, 무기력, 완전함 등으로 다소 축약해서 표현했던 것이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 일인지 이야기로 풀어보고 늘어 놓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뭔가 정답을 전제하는 식으로 쓰는 습관을 반복하려 하고 있어서, 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고민을 좀 가져와야 한다는 샘들의 조언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일단 다음 주에도 쭉 써나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제 & 공지]
  1. <우상의 황혼> 131~168쪽(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3절)까지 읽고 단편 하나 혹은 구절을 골라 한 페이지 정도 적어주세요.

  2. <죄와 벌> 5부, 6부 읽고 선과 악 혹은 힘에의 의지와 결부시켜 생각해보고 싶은 구절 5개 골라오기

  3. 코멘트를 반영하여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세 번째 페이지 쓰기.

  4. 간식은 정아샘과 수연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5. 주영샘의 후기가 올라와 있으니 나영샘조의 토론 내용은 거기서 확인해 주세요!

  6. 지각과 결석은 반장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시더라도 꼭 도반들이 모두 있는 단톡방에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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