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7주차(6.19) 공지

작성자
나영
작성일
2021-06-13 23:58
조회
120

집에서 에세이 쓸 때는 세상 심각한 문제인데 세미나만 하면 왜 이렇게 별거 아닌 문제로 혼자 오바육바 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세미나에서의 번뇌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있는데 선생님들의 코멘트를 듣고 집에 오면 정말 이대로 땅으로 꺼져야겠다 싶더라고요.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져서요. 저만의 관점으로 보던 문제를 샘들 모두의 관점으로 다시 보게 되니까요. 그러면 아주 무거웠던 문제는 완전히 가볍게 재해석되기도 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흘러 넘겼던 문제는 묵직한 과제로 남겨질 때가 있는데요. 이게 또 너무 감동적이어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넘쳐나네요♥ 에휴 이 성급함 어쩔 것인지.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사건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으로 보면 볼수록 더 많은 실재와 더 많은 세계를 자기 안에 담을 수 있게 되겠죠. 요즘 <반시대적 고찰> 세 번째 글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와 <즐거운 학문> 서문에 꽂혔는데요. 연속으로 천 번은 읽고 싶을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아름다운 글이어서요. 공지를 핑계 삼아 이 아름다운 두 텍스트와 함께 어제의 세미나를 정리해보는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글이 좀 길어질 것 같은데요. 혹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1. 경계와 높이의 철학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은 시대에 맞지 않게 시대의 유형을 거스르면서 그 시대에 함축되어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파악하려는 성찰의 글입니다. 현재의 삶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자기 시대를 벗어나서 볼 수는 없습니다. 니체 자신도 자기 시대의 아들임을 인정했으니까요. 그런데 한 다리는 자기 시대에 걸치고 있으면서 또 다른 다리는 시대의 경계에 둡니다. 중심을 가지면서 변방을 가져야 하는 거예요. 니체는 지하로 파고 들어간다, 수직 갱도로 내려간다 등의 자기 본질을 파헤치는 작업과 함께 사다리에 올라간다, 산으로 올라간다 등의 ‘높이’의 철학을 말하는데요. 높은 곳에서는 모든 게 저 아래에서 보고 느끼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분명 땅에서는 장애물이었는데 높이 올라가서 보면 전혀 장애물이 아닌 게 됩니다. 좀 더 옆으로 갔다면 다른 길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땅에서의 자신의 시선에서는 전혀 안 보여요. 그래서 니체 철학은 어떻게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런 시선으로 자기의 시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습관과는 다르게 우리의 실존을 무모하고 위험하게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죠.

#2. 멸균된 세계, 유토피아의 꿈

그러면 니체는 무엇이 자기 시대의 문제라고 보았느냐? 니체식으로 말하면 ‘데카당’이겠고, 저는 이걸 괴테식으로 말하자면 ‘생동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괴테의 팬이었던 니체는 괴테의 글이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자들이 왜 이렇게 창백하고 불안하며 생동감이 없냐고 묻습니다. 중요한 건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동감이라고요. 생동감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는 유토피아를 향한 신학적 환상이 한몫을 차지합니다. 지금 여기가 사라지고 삶이 사라집니다. 나에게 불쾌감을 주는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을 꿈꿉니다. 멸균된 세계 같은 거예요. 내가 미워하거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더럽고 불편한 것들이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다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고통 없는 세상을 원하게 됩니다.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게 다 사라지면 또 다른 고통의 요소가 생겨날 텐데도 말이에요. 이건 경험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죠. 그런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또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합니다. 나를 멈추게 하는 힘으로 다시 걷게 되기도 합니다.

고통스러운 모든 게 사라지는 세계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를 않아요. 어디에 주의집중을 하느냐에 따라 욕망도, 해석도 다 달라지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반시대적인 관점과 높은 곳에서의 관망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문제겠습니까. 대부분은 그렇지 않죠. 나의 관점으로 세계를 확장해버립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모든 것에 번뇌를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멸균된 세상을 원하고 또 좌절하는, 이런 기대와 실망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요.

#3. 생성 변화하는 세계 vs 고정시켜두려는 인간의 속성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에 냉혹할 정도로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냥 대충 퉁치고 넘어가지 말고요. 그래서 “정치와 민족 이기주의의 천박한 시대적 헛소리를 자기의 발 아래의 것으로 내려다보는 법을 익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시대의 헛소리란 그 시대를 지배하는 관념과 담론 같은 거겠죠. 그리고 자신의 습관적인 관념에 질문을 던지고 사유라는 걸 시작해야 합니다. 그냥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도록 마음에 밭을 가는 사유요. 들뢰즈의 ‘괴물의 사유’라는 표현이 오바가 아닌 거죠. 괴물과 사유할 수 있을 때야 사유를 한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연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반시대절 고찰>의 “우리 삶의 번거로운 시설들은 우리의 진정한 과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삶의 매 순간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혼자 조용히 있을 때 무언가 귀에서 속삭이는 것이 겁이 난다. 그래서 우리는 고요함을 싫어하고 사교로 귀를 먹게 한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상의 황혼>에서는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이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 안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니체의 긍정은 이런 문제를 대면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낯설고도 가혹한 문제를 돌파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긍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우리는 익숙한 것으로 환원시켜버리고 맙니다. 나에게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건 생명의 본성이기도 해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에요. 그러니 이 생성 변화하는 세계에서 낯설고 가혹한 문제를 돌파하지 못하고 고정시켜두려고 애를 씁니다. 이 본성을 없앨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방식의 본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습관에 브레이크를 거는 언짢은 문제가 발생하는 사건 자체를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니체의 제안 : 세계와 나를 힘으로 보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나를 고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니체는 세상을 힘으로 해석하기를 제안합니다. 무엇이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건 없습니다. 사람도, 사물도, 이성도 모두요. 오직 힘들이 만들어낸 특정한 양상에 불과한 모든 게 존재할 뿐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건 다 힘의 산물이 됩니다. ‘나’에서 출발하는 습관을 버리고 ‘힘’에서 출발하려는 시도. ‘나는 나’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나는 곧 세계’라는 접근을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가치의 절대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그냥 다 우리의 상상이고 허구일 뿐인 게 되겠지요. 민호샘이 연재하는 루크레티우스의 글, 원자와 원자의 운동도 이와 상통한다고 봅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는 니체의 힘 개념과 함께 해석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 넘쳐나는데요.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있어 이 구절을 니체의 힘과 우주적 차원에서의 관점과 엮어보고 싶습니다.

“각각의 것에서 떠나가는 몸체들이, 그것이 떠나는 그 사물은 줄어들게 만들고, 그리로 옮겨간 그 사물에게는 성장을 선물한다. 이들은 전자를 늙어버리게 만들고, 후자는 반대로 피어나게 만든다. 하지만 거기에도 계속 머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해서 사물들의 총체는 항상 새로워지고, 필멸의 존재들은 서로 차례 바꿔 산다. 한 종족은 늘어나고, 다른 종족은 감소한다, 짧은 간격 속에 동물들의 세대는 교대하며, 마치 주자들처럼 생명의 횃불을 전해주고 있다.”

이런 우주의 필연과 관계성을 이해하고 도출한 긍정이 니체식의 긍정입니다. 그냥 무조건 다 괜찮다는 게 아니에요. 존재론적인 지평이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니체는 이것을 “사람들은 필연이며, 한 조각 숙명이다. 사람들은 전체에 속하며, 전체 안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뭐가 제거된 멸균의 세계 이런 건 있을 수가 없고,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조차 우주의 모든 것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5. 니체가 말하는 자유

힘으로 세계를 이해할 때 생각지도 못한 자유가 펼쳐집니다. 세계가 운동하는 힘들로 구성되어 있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없다는데 구속당할 게 뭐가 있겠어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에요. 무한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자유를 발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계가 열리는 것보다 좋은 게 뭐가 있냐고 묻습니다. “좋은 것은 무엇인가?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힘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이 돼요. 나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건 분명 자기가 강화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겠죠. 그리고 이런 느낌을 받는 만큼 자유로워지고 이때의 자유는 얽매이는 것들로부터의 자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는 거죠.  <반시대적 고찰>에서 또 이런 말을 해요. “왜 이 고향 땅에, 이 생업에 매달리는가, 왜 이웃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가? 몇백 마일만 가도 구속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견해에 얽매인다는 것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가?” 하고요. 니체를 공부한다는 건 나를 해방시키는 일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의 차원에서 세계를 보면 자유와 행복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6.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니체의 개념과 언어로 기존의 습관적인 해석 방식을 버리고 다시 해석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철학 개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작동시키면서 춤추듯이 놀아보는 거예요. 저에게는 세미나가 끝난 뒤에 쓰는 이런 글이 되겠고요. 또 에세이나 공통과제나 토론이 되기도 하겠지요. 더디기는 하겠지만 이런 연습을 통해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가 니체 철학이 체화되는 순간이 될 것이고, 그때 세상은 그 무거움을 잃게 되겠죠. 세상의 사건들과 힘들은 그 자체로 멋진 것이 될 거고요. 그렇게 위대한 정오를 만나게 될 겁니다.

 

[과제 & 공지]

1. <안티크리스트>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 쓰기
2. <악령> 3부 5장(하권 중간)까지 읽고 니체의 도덕, 힘의지와 결부시켜서 생각해 보고 싶은 구절 5개 골라오기
3.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피드백 반영해서 쓰기
4. 다음 주 간식 : 은옥샘, 고은샘

 

 

 

 

 

 

+더 보기

요즘 니체의 신체성이나 습관, 높이의 철학 등을 공부하면서 문득 오래전 남프랑스 여행이 떠올랐어요. 그때 프로방스와 니스를 지나 모나코로 가는 길에 ‘에즈(Eze)’라는 작은 마을에 들렸거든요. 교통도 불편한 곳이고 딱히 목적도 없이 그냥 갔는데요. 글쎄 니체가 1883년 12월부터 1884년 4월까지 여기서 지내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어요. 찾아보니 ‘니체의 길’이라 이름 붙인 산책로도 있더라고요. 저는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걷긴 했지만 이 마을 자체가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산책로가 아니라 산비탈길 등산코스거든요. 산 속 동굴에 살다가 시장터로 내려오고 다시 떠나 산에 오르는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탄생했는가 봅니다. 덕분에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읽다가 주말이 다 지나갔네요. 사진 몇 장 올려볼게요. 



걷다가 너무 힘들어서 손이 떨려 제대로 찍지는 못했는데 대략 이런 높은 고지의 마을이에요. 로마인들의 요새였던 곳이래요.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로서의 건강을 말하는 니체가 선택한 지역이라니 또 다르게 보입니다. "높이 오르려 할 때 너희는 위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이미 높이 올라와 있는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너희 가운에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높이 올라와 있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더없이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모든 비극과 비극적 엄숙성이라는 것을 비웃는다."



서문에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고 싶어서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러기 위해 나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네가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에 빛을 가져다 줄 때"라는 구절이 있고 또 "바다 속에서 그리하듯 그대는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런 그대를 바다가 떠받쳐주었지",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아마도 이런 절벽에서 바다를 보면서 쓴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역사 깊은 마을의 좌우명은 라틴어로 "Isis moriendo renascor(In death I am reborn)"인데 니체는 여기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 같아요. 차라투스트라의 상징적인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떠올리기 딱이죠?



이거는 제가 찍은 사진은 아니고 검색해서 가져온 사진인데 이렇게 '니체의 길'이라는 표지판도 있더라고요. 차라투스트라 3부를 여기서 썼대요. 3부가 영원회귀 나오는 진짜 엄청난 장이거든요. "나 나그네요 산을 오르는 자다. 나 평지를 좋아하지 않고, 오랫동안 한곳에 앉아 있지도 못하는 것 같다. 나 어떤 숙명을 맞이하게 되든, 나 무엇을 체험하게 되든, 그 속에는 방랑이 있고 산 오르기가 있으리라." 3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라는 단편이 3부에 있는데, 가장 힘든 등반을 하며 완성했다고 해요. 걷기왕 니체도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약한 사람의 특성은 언제나 이러하니, 저들은 도중에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로에 지쳐 마침내 묻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겠다고 우리는 길을 나섰던 것이지!" 이 문장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엄청난 매력이 있죠. "산이 높아질수록 나와 함께 산에 오를 사람은 그만큼 적어진다."고 했으니까요. 이런 길을 걸으면서 "너희의 길을 가라! 민중과 민중들에게는 저들의 길을 가도록 하고!" 이런 문장도 떠올랐을 것 같고요.

 

또 다른 때 독일에 갔는데요. 그때도 딱히 왜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이델베르크에 갔어요. 거기서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게 사진에는 안 담기는데 약간 비탈길이어서 제가 생각했던 뒷짐지고 설렁설렁 걷는 평지 산책로는 아니었어요.



괴테도 걷고 칸트도 걷고 헤겔도 걸었다는 길을 걸어봅니다. 사유는 머리가 아니라 두 발로 하는 게 정말 맞나 봐요. <이 사람을 보라>가 떠오르네요.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어쩐지 저의 편견... 내장... 연구실 세미나... 그러므로 니체 세미나는 야외에서 걸으면서 해야 하는 겁니다...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다 본 하이델베르크. 이런 곳에서 내려다보면 땅에서의 장애물은 장애물이 아니게 되고 막혀 보였던 길도 막힌 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겠죠. 니체와 함께라면 어떤 길이든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기는 밤입니다. 많이 빡세긴 하겠지만요.
전체 4

  • 2021-06-14 09:28
    아뉘... <과제&공지>까지 보고 끝인 줄 알고 댓글 쓰려고 내리다가 깜짝 놀랐네요. 보너스 사진과 설명까지....!! 남프랑스에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썼다니 전혀 몰랐어요. '니체의 길'도 있다니.. 다음번에 가게 되면 꼭 찾아가봐야겠어요!
    나영샘 이번 글 보면서 좀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는데 저만의 느낌일까요...?ㅎㅎ '이건 아니다'라고 하셨지만,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네요. '나영샘(+저와 니체반 샘들 모두) 화이팅!'^^
    아참, 나영샘 주말 공부의 결과물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대시적 고찰>은 읽지 못했는데 저런 구절들이 있군요. 역시... 좋네요. 루크레티우스의 글도...

  • 2021-06-14 16:14
    나영샘이 잘 정리해준 개념들과 함께 아름다운 사진까지... 정성이 가득한 공지와 후기네요.^^
    발랄하고 리더쉽있는 나영반장님이 세미나반장 하면서 이러저러한 고통이 있는지 정말 몰랐었는데, 또 이것들이 쌤의 사유를 깊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 같아요.
    오늘 내용들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저도 남프랑스 여행하면서 에즈는 그냥 스킵했던거 같은데, 담에 가게 되면 힘들더라고 꼭 가고 싶네요. 공부보다는 여행에 대한 의지가 강해지는 이 느낌..ㅋㅋ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은 힘들지만 넘 좋았던 기억인데, 그땐 철학이란 이 길에 오르는 것처럼 힘든것인가보다... 라는 생각만...ㅎㅎ
    다시 거닐고 싶네요.. 이번엔 뭔가 철학적인 개념 하나 붙들고 사유하면서...ㅋㅋ

  • 2021-06-15 09:38
    철학 개념을 춤추듯 가지고 놀아보는 후기 멋집니다!!
    <반시대적 고찰>과 <차라투스트라>, <이사람을 보라>, 그리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까지 샘이 요즘 읽고 생각하고 계시던 것들이 모여서 어우러진 후기네요!!
    친절하고 꼼꼼한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2021-06-16 10:50
    정말 나영샘 후기 넘 멋지네요!! 언제 이 많은 책들도 또 다시 다 보시고... + 여행과도 연결지어 주시고! - 저 곳들 전 아직 못 가봤는데 꼭 가고 싶어요!!
    숙제만 겨우 하는 저로서는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 리스펙트!!!
    저는 샘하고 짜라투스트라 함께 읽고 싶어요. 아직 못 읽었는데 다들 제가 되게 좋아할거라고들 하셔서 저도 그럴 거 같고 ㅎㅎ
    멋진 후기 감사합니다. 항상 나영샘 문체는 생기있고 재미있어서 읽을 때마다 청량한 기분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