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5주차 후기

작성자
인영
작성일
2021-06-07 00:50
조회
107
이번 주는 2학기 5주차 에세이 중간 점검이 있는 주간이라 과제 때문에 수면이 부족한 채 오신 샘들이 많았습니다. 어느새 민호샘과 매주 나누는 안부 인사는 ‘몇 시간 잤어요?’가 되었죠. 몸이 피로하면 생각도 말도 헤매고 실수하기 쉽죠. 그래서 무엇보다 세미나에 참여할 때 몸 컨디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과제에 대한 과욕과 습관 때문에 새벽까지 붙들고 있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미나 시간에 제가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조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제가 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 사람 몸 상태가 좋지 않구나’ 또는 ‘정신차려’라는 충고를 해주시면 감사할 듯합니다!

이번 주도 역시 저는 좀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특히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팠기 때문에 지안 샘의 충혈된 눈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죠. 루이샘도 역시 에세이 과제로 수면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샘은 눈이 충혈되거나 안색으로 드러나지 않으셔서 말해 줄 때까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루이 샘이 말해주길 피곤해도 주변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그러자 지안 샘이 주역에서 눈의 흰자위는 금을 가리키는데 사주에 금이 부족한 이들은 충혈이 잘 된다고 말해 주셨어요. 같은 사건이라도 서로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고 또 다르게 해석, 오해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역(잘 모르지만 ^^;)에서 신체를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과 니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신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1교시 [안티크리스트] 동정과 연민에 대한 이야기를 샘들과 이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과제를 하다 밤을 새다시피 하고 와서 ‘힘들다’고 하는 하소연에는 ‘나 좀 위로해 줘’ 라는 동정을 바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힘들다는 하소연도 위로의 말도 서로에게 불필요한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졌죠. 제 질문에 지안 샘은 ‘그런데 몸이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낫더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어요’ 하고 웃으셨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나눈 짧은 대화였지만 우리 셋 모두 피로한 상태라는 것, 오늘 우리의 신체 상태는 ‘비비고 아니고 버티고’ 임을 서로 이해하고 묘한 연대감을 느끼며 함께 웃었습니다. 항상 과제 늦게 올리는 저를 포함한 뒤 순서 샘들 모두 파이팅! 우리 일찍 올리고 숙면하고 옵시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적 ‘동정’을 상대가 발휘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그 힘을 분리시키고 무력화 시킨다는 점에서 비판합니다. 이는 수연샘의 과제 제목 ‘동정 포르노’라는 말과 너무나 적확합니다. 동정을 원하는 것도, 동정을 하는 것도 자신의 쇠락한 상태를 만천하에 전시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러한 니체의 동정에 대한 해석은 제가 더 이상 추해지지 않도록,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멀리하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 챙겨주고 싶은 마음과 행위와 같은 충동은 여전히 못말리는 짱구입니다. 일명 서로를 촉촉하게 해주는 서비스 멘트들이 뇌를 거치지도 않고 나오는 습관도 여전하기 때문이죠. 이것도 일종의 제 방어 기제이고 제 병인데 어쩌면 니체로부터 우정과 사랑하는 법을 더 배워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야전 침대 같은 멘트들을 듣기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니체의 저작에는 살 떨리는 독설이 넘쳐나는데요, 어떤 면에서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바그너, 쇼펜하우어 그리고 그리스도교 였음의 반증이겠네요. 채운샘이 저희들에게 지적 호기심 좀 가지라고 하셨는데, 저희에게는 니체적 의미의 우정과 사랑도 너무나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순이샘, 민호샘이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동정과 불교의 자비를 비교해 주셨어요.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을 키워드로 설명해 주셨는데,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추상화시키지 않으며, 피안과 즐거움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을 생성의 관점으로 보고자 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은 세계를 인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위로 드러난 현상이 전부이며, 어떤 결정론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 또한 니체의 사유와 많은 것들이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고통에 대한 시야가 매우 좁다. 육체를 현상적으로 보며 육체의 고통을 의사처럼 치료하거나 진통제를 쓰려고 한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개별적인 사항들을 모두 제거하고 보편적인 관점, 개념화 된 사랑으로 퉁치고 덮어버린 이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보편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 남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대중적 버전의 그리스도교인 즉, 플라톤주의자를 제게서 발견하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앞으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적 동정과 연민이 아닌 방식으로 타인과 무엇을 나눌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조원들과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순이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 진정한 보시라고 하셨고, 은옥샘은 태양과 같은 증여 방식, 민호샘은 공부를 예로 내가 아는 게 없는데 뭘 나눠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며,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준다’는 의미가 발생한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또 ‘무주공산’을 예로 주었다는 표상을 지우는 것이 중요하며, 베푸는 것의 행위에 대한 표상을 넘어가려면 이름없이, 소유권 없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소유와 증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는데요, ‘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무엇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 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가 저에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에 안 쓰는 TV를 직원에게 주기로 하고, 갑자기 그 TV가 좋아보여 하룻밤 사랑에 빠졌던 저의 모순된 마음에 엄청 쪽팔렸죠. 저녁에 돌아와 TV가 떠난 빈 자리를 보니, 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해졌고, 어쩐지 짐 하나를 던 것 같아 좋았습니다.

두둥~ 드디어 에세이 중간 점검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세미나 시작 전 복사기 앞에서 스테이플러로 과제물을 집고 있었는데, 연구실 규창샘이 ‘에세이는 잘 되가고 있나요?’ 하면서 한 부를 슥 집어 읽으려고 하길래, 저도 모르게 ‘음, 쓰레기에요’ 하며 얼른 회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예언이 되었습니다. 저는 에세이를 완전 엎고 새로 쓰게 되었는데요, 무엇이든 제 글의 밑거름이 될 테니 괜찮지만, 눈물은 좀 흘리고 갈게요. 안구건조증엔 자가 눈물이 최고죠! (ㅜㅜ)

채운샘의 자신의 글을 드라마화, 객관화하라는 뜻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루이샘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요? 루이샘은 용기를 내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쭉 쓰셨다고 해요.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 다시 읽어보면서 너무 주관적인 이야기라고 느껴져 모두 지우고 두 단락만 남기셨어요. 그 고민의 순간을 듣는 조원들 모두 경험해본 적 있을 것 같아요.  샘이 어떤 마음으로 쓰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됐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하기 위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타인들에게 읽힐 때, 타인들의 읽힘 속에서 루이샘의 이야기는 드라마화 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도 그 글로부터 자신을 하나의 인물로 배치해 객관화하여 보는 것이 그 의미일까요? 여하튼 루이샘은 지우신 글들을 다시 가져오신다고 하셨고, 함께 읽으면서 우리의 문제와 함께 다 같이 열심히 떠나가고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늦은 시간까지 ‘버티고’를 해내신 샘들과 모든 팀원들에게 보시와 같은 코멘트를 해주신 채운샘,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새롭게 주어진 에세이 주제, ‘읽고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중 쓰기에 대한 니체의 아포리즘을 옮겨 놓으며, 2021년 절차탁마NY니체팀, 2학기 에세이 발표까지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발로 쓰다.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은 아니다.

발도 항상 글 쓰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한다.

내 발은 확고하고 자유롭고 용감하게

들판을, 종이 위를 달린다.   [즐거운 학문, 52절]
 

 

그런데 그대는 도대체 왜 쓰는가?— A: 나는 잉크에 적신 펜을 손에 들고 생각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 더구나 잉크병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종이를 응시하면서 자신을 정열에 내맡기는 사람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쓰는 일에 화가 나거나 수치를 느낀다. 쓴다는 것은 내게 용변을 보는 것처럼 피치 못할 일이다. 비유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내게는 역겹다.  B: 그렇다면 도대체 그대는 왜 쓰는가?  A: 친애하는 이여, 그대를 믿고 말하건대 지금까지 내 생각을 털어버릴 다른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B: 그렇다면 왜 생각을 털어버리고 싶어 하는가? A:왜 그러고 싶어하느냐고? 내가 그러고 싶어한다고? 나는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B:알았네! 알았어!     [즐거운 학문, 93절]
전체 2

  • 2021-06-08 10:00
    파이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팅이, 파이팅만이 읽히는 후기네요!!
    이번 학기는 안구건조증 걱정 없이 힘내서 가 봅시다ㅎㅎ 물론 몸을 망가뜨리진 말구요! 벌써 반을 지나왔습니다.
    인영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저는 정말로요.
    "왜 그러고 싶어하느냐고? 내가 그러고 싶어한다고? 나는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알았네! 알았어!" 뭔가 저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베껴온 것 같은 대화네요...

    • 2021-06-08 18:19
      제가 파이팅에 매우 진심이었나 봐요^^ 6월 5일 <불교와 글쓰기> 팀 윤지샘의 후기를 읽고, 후기에서 언급된 유튭 영상을 찾아본 게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해요. 서로 다른 박자로 움직이는 여러 대 메트로놈이 서로 공명하며 하나의 박자로 움직이게 되는 과정이 정말 신기했어요. 제가 참여했던 지난 니체 세미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니체 세미나에서 제가 팀원들로부터 받는 영향뿐 아니라 제가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같은 공간에서 팀원들의 안색을 살피는 것,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함께 공명하게 되는 것,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일지 앞으로 고민해 보고 싶어요.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답은 없으므로 계속 만들어나가야 하겠죠? 함께 좋은 기운으로 공명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샘들이 우선 기운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파이팅~~’을 외쳐 봅니다! (그리고 제가 누군가에게 든든한 구석이 생겼다면 아마도 그 누군가 덕분일 거예요ㅎㅎ)